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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고 Mar 11. 2023

당신이 앨리스인가, 아니면 내가 앨리스인가.

<큰돌이는 무슨 죄인가.>



 많이 아는 것도 없지만, 그래도 살아가며 쌓이는 경험과 고작 몇 권의 책으로부터 얻어낸 지식들이 조금씩 누적될수록 분절되고 흩어진 지식들이 차츰 군집을 이루고, 개별적 정보의 단면들이 맞닿아 결합되며 하나의 질서가 세워진다. 세계관은 조금씩 희미하게.. 하지만 어느새 그 형체가 분명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세계관'이라는 건 일종의 '일이관지'라는 생각을 하는데, 세상이라는 무수한 사건의 집약체 속에서 살아가는 개별자가 일관된 시각으로 개별사건을 견지하는 자세일 것이다.

따라서 거시적 세계 속에 던져진 미시적 개인이 현명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충분한 정보량이 요구되기 때문에 현명한 세계관을 가지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나이를 먹으며 살아가다 보면 경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보고 배운 지식들이 누적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관이 정립되기도 한다.

그렇게 구축된 자신만의 고유한 관점과 도덕성을 가짐으로써 혹여 타자의 세계관과 충돌이 일어나더라도 현명하게 대처하며 살아가는 게 일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다가 한 번쯤 세계관이 불안정하거나 유난히도 미성숙한 사람을 목격하는 경우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최근 통장을 이용당하여 두둑히 금전을 챙김 당하신 분에게서 우연치않게 미숙한 세계관의 행태적 사례를 보고야 말았다.

사건인 즉슨, 근자에 그분께서 친히 한 지역시장을 방문하여 친숙하게 '박달대게'를 들어 올리시고는 무려 이름까지 지어주셨다고 한다.  아마도 그 이름이 '큰돌이'였다고...? (평소 도리도리가 익숙하신 분인가 보다.)

그리고서는 잠시 후 그 앙~귀여운 큰돌이를 푹~ 쪄서 가져가셨다고 들었다.  뭔가 대단하다.


세상의 많은 존재가 귀여움, 사랑스러움을 가지고 있어도 사람들이 그러한 모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 건, 곧 한 존재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예정된 사실을 알게 된 것에 대한 '애도',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으로서 죽음이 가해질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가슴 한 구석의 죄책감, 그리고 자신을 그러한 감정에 온전히 놓이게 하지 않기 위해 방어적으로 마음을 닫는 행위인 것이다.


한 대상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에는 의미가 내포된다.

대상에 대한 미시적 분류와 동시에 보다 구체화된 감정이 대상에게 부여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특정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애써 이름을 붙여주려 하지 않는 게 보통일 텐데...


돈쭐 난 그가 세계관이 충분하게 잡혀있지 않았다는 건, 단지 이름을 지어준 행위에 불과하더라도 그러한 행동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세계관이란 사건을 대하는 일관적인 태도이기 때문에, 예컨대 회사에서는 예의 바르고 친절하지만 퇴근하고 나면 폭력적으로 바뀌거나, 그리고 또다시 장소가 바뀔 때마다 도덕성/인성이 변하는 게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관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다양한 상황을 대처한다.


그런데 한 생명체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이름을 지어주고, 잠시 뒤에 그것을 먹는다?

횟집에 가서 수조 속의 물고기에게 이름을 지어 준 다음, 사장님에게 "이거 회 떠주세요"라는 게.. 어떻게 세계관이 분절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보통 이런 걸 일상에서는 농담처럼 '사이코패스'라고도 했던, 바로 그런 행동이었는데.. 그걸 실시간으로 한국의 정치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과연 귀하가 앨리스인지, 내가 앨리스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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