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호저의 딜레마

진심의 반작용

by 채늘





나는 30대가 되기 전까지 내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간 사람으로부터 너무 받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한 실수가 상기되는 일이 싫어서.

어딘가에 기부를 반드시 해야한다면 난 고민없이 동물이나 환경에 관련된 기부를 선택할 정도로, 사람에 대한 무의식적인 혐오감을 드러내곤 했었다.


30대가 되고나서야 이것이 '호저의 딜레마'에 의한 반작용같은 것이었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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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어느날, 서로의 온기를 위해 몇 마리의 고슴도치가 모여있었다. 하지만 고슴도치들이 모일 수록 그들의 바늘이 서로를 찌르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추위는 고슴도치들을 다시 모이게끔 하였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기 시작하였다. 많은 수의 모임과 헤어짐을 반복한 고슴도치들은 다른 고슴도치와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 것이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 사회의 필요로 인하여 인간이라는 고슴도치들이 모이게 되었지만, 그들은 인간의 가시투성이의 본성으로 서로를 상처 입힐 뿐이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서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예의를 발견하였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서로의 거리를 지키기 위해 거칠게 말해지곤 하였다. 이 방법을 통해 서로의 온기는 적당히 만족되었으며, 또한 인간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릴 일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남을 찌를 수도, 자신을 찌를 수도 없었던 사람은 자신만의 온기로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그의 저서에서 위와 같은 우화를 말하며 누군가로부터 온기를 갈구하는 사람들은 그로 인한 상처를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위키백과 출처)



나는 만으로 20살 무렵부터 독립해서 많은 일을 해가면서 빠르게 경제적 자립까지 해냈다. 우스운 것은 첫 독립을 겪으며 거주마저 불안정하던 그 시절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어느정도 안정 궤도를 찾은 지금이 심적 고독감이 더욱 심하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평일에는 열심히 일하고 휴일에는 혼자 훌쩍 당일치기 여행을 자주 다녀오곤 했다.

스스로 외로움과 스트레스 조절을 어느 정도 잘해내던 시기였다.

한 추운 겨울날 아침에 급하게 떠났던 양평 여행이 아직도 간간히 떠오른다.

따뜻한 두유 한 병을 핫팩 대신 주머니에 넣고 꽁꽁 얼어있는 두물머리 호수를 가로질렀던 기억.

지는 해 근처의 종이학 모양을 한 카페를 먼 발치에서 한 참 바라봤었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운좋게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석양이 전부 질 때까지.

그 때 내가 느꼈던 건 외로움이나 고독함보다는 감사함이었다.

혼자서 많이 힘들었을텐데 건강하고 씩씩하게 여기까지 잘 올 수 있었구나하는,

앞으로도 여러 가지를 눈에 담아야지하는 다짐이 들어간 감사함이었다.


two-water-head-368165_960_720.jpg 내 기억과 가장 유사한 사진.. 대신 강이 온통 얼어있었다.


혼자 다니는 여행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게 된 것이 벌써 몇 년이 된 것 같다.

양평에서의 소중한 기억 이후로 처음으로 길게 사귀었던 연인이 생기고, 일상의 소소한 부분까지도 공유하는 친구가 생기면서 내 인생에는 안정감과 함께 상실감이 자리잡았다. 하나보단 둘일 때 기쁨이 더 커진다는 자연스러운 진리를 깨우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누군가에게 의지할 때마다 그 의지하던 사람이 무너지거나 사라졌을 때 같이 무너져내리게 되는 무서운 경험을 하기도 했었다. 나는 누군가와 가까워질때마다 그런 위험을 걱정하다가도 어느새 그런 불안을 흠뻑 끌어안고 누군가와 함께 하기를 절실히 원하게 되곤 했다. 그 같은 굴레에서 호되게 구르는 날이 반복되니 스스로 사람을 싫어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걸 넘어서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최근들어 고속도로를 주로 달리는 장거리 운전을 하는 날이면 나는 음악보다는 자아나 인격에 대한 강의를 듣곤 했다. 운전이 익숙해지면서 평소 너무 과속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을 하게 됐고, 속도를 90에서 100정도로 놓고 2차선 쯤에서 여유롭게 가길 선택하게 되었다. 강의는 이런 안전하지만 지루한 길을 가기를 선택한 나에게 유익하고 재미있는 선택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강의 주제가 내 마음을 두드렸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누군가는 그냥 넘길 수 있는 상황을 나는 왜 곱씹을만큼 아파할까.

답은 간단했다.

내가 진심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 상황에 최선을 다해서 진심으로 부딧쳤기 때문에.

반대로 내가 진심으로 응한 것에 대해 긍정적인 결과가 이어지게 되면 그만큼 소중한 기억으로서 나를 자립시킬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더라. 양평에서 만났던 그 환상적인 노을과 종이학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를 활기차게 만들어준다.

그렇다고 내가 너무 지나치게 진지한걸까, 내가 어딘가 잘못된 걸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냉정히 생각해보아도 사람마다 지문과 홍채가 다르듯이 누구에게나 고유의 성질이 있는 법이다. 또 모든 상황에 누구나 똑같이 반응한다면 사회 발전같은건 없었을 것이다. 갈등으로 인한 발전은 동물의 고유성질인것을.



매사에 진지하게 누군가와 부딪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더이상 갖지 않기로 했다.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는 후회가 남지 않는다. 후회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의 몫이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누가 돈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돈에 미친 사람이야.'


이제와서는 고백할 수 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과 교감하는 것에 빠져 있다. 하지만 사람은 호저처럼 누구나 고유의 성질과 가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면 혹은 그들이 나를 사랑하다면 서로에게 상처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마저도 나를 이렇게 깨닫게해서 나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다양성이라고 생각하니 사랑하진 못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기분이 든다.


굳이 나를 위험한 상황에 노출시키진 않겠지만 적어도 누군가와 인연의 실이 닿게 된다면 최선을 다해서 손을 내밀어야지.

그렇게 다짐하고나니 그 날 고속도로에 펼쳐진 산등성이 너머로 예쁜 노을이 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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