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웅 이사장의 책 만들기
책 만들기란 무엇일까? 지난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떠오른 질문이다. 가지각색의 출판사가 그들만의 특색이 담긴 책들을 만들어 전시해 둔 풍경은 여러모로 가슴 뛰는 모습이었지만, 동시에 '책이 너무 많다'는 탄성을 뱉게도 만들었다. 그리고 또한, 성균지를 짓는 일원으로서 마음 한구석이 뜨끔했다. 우리는 왜 책을 만들고 있을까, 왜 만들어야만 할까.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겠지만, 앞서간 선배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111호 출판문화 코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번 호에서는 책의 도시가 출판문화의 선명한 구심점이 될 때까지, 그 밑그림 단계부터 시작해 몇십 년간 쉬지 않고 달려온 이기웅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 이사장을 만났다. 함께 가는 출판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며, 이 시대의 책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그에게 물음을 던져보았다.
이기웅 이사장은 예술출판사 ‘열화당’의 설립자이며,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출판단지’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해 조성, 유지까지 파주 책마을 공동체에 헌신해 온 인물이다. 현재 파주출판도시 명예이사장을 지내고 있고,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오랜 동문이자 대선배이기도 하다. 대학 졸업 후 1960년대부터 출판업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1980년대 출판도시를 구상하기까지, 이기웅 이사장은 책과 사람에 대해 거듭 고민해 왔다. 한 권의 책에 많은 사람의 마음이 담기듯, 이기웅 이사장은 출판도시를 일구며 그 속에 자신의 신념을 담았다.
이기웅 이사장은 출판인들, 나아가서는 예술인들과 함께 더 나은 쪽으로 가기 위해서 일평생을 바쳤다. 성균지 편집위원들이 열화당 책 박물관을 찾았을 때 그가 가장 먼저 꺼내 보여준 『책과 선택』은 그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잡지다. 이 이사장은 구석구석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책이라며, 애정이 담긴 『책과 선택』 초기 출간본을 직접 가져와 한 장씩 넘겨 보였다. 『책과 선택』 7호의 지면에는 그 당시 인기를 끌었던 에세이 문고부터 어학, 문학, 예술 서적을 주로 출간했던 평화출판사, 오규원 시인의 문장출판사, 오늘날까지 이름이 익히 알려진 문학과지성사 등 여러 출판사의 책들이 시선을 사로잡는 디자인과 함께 실려 있었다.
『책과 선택』은 열화당의 책만을 홍보하는 대신 독자 입장에서 새로이 느낄 만한 책들을 소개하는 데 집중해 왔다. 한 장 한 장마다 고민이 녹아 있는 이 잡지는 70년대 말부터 발간되기 시작했다. ‘미술신간뉴우스’라는 이름을 달고 80년대 초까지 타블로이드판 한 장의 신간 정보지로 발간되었던 『책과 선택』은 북디자이너 정병규 선생과의 만남으로 1983년 6호 발간부터 잡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기웅 이사장은 일간지나 신문 지면에 신간 광고를 크게 내기 어려워 작은 홍보 지면 하나하나가 아쉽게 느껴졌던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책과 선택』을 열화당만의 신간 홍보지보다는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책들을 한데 보여주는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함께 가려고 하면 물론 더 고생한다. 짧게라도 고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함께 더 나은 쪽으로 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런 마음으로 『책과 선택』도 만들고 출판단지도 만든 것이다. 어느 한 책을 잘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 같이 책을 잘 만들기 위해서, 우리나라 출판인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종이의 메시지는 종이답게
어떻게 하면 책을 잘 만들 수 있을까? 책을 만드는 일에 대한 고민은 필연적으로 매체 환경의 변화와 함께 갈 수밖에 없다. 특히 대부분의 정보가 디지털로 유통되기 시작한 90년대 중후반은 무엇을 찍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본격적으로 요구되던 시기였다. 동시에 인쇄출판 자본이 확장되며 종이책을 찍어내는 매체의 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격동의 시대, 수많은 의제의 공론장이 되어왔던 출판사들에게 디지털의 등장은 새로운 관문이었다.
『책과 선택』 역시 1994년 16호를 낸 이후 2017년까지 긴 공백기를 가지며 수많은 책 중 무엇을 읽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 왔다. 수많은 매체에서 정보가 넘쳐 흘러나오는 시대, 종이책으로 어떤 유의미한 지점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은 다시 새로운 호를 발간할 때까지 풀어야 할 숙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보들 사이에서 읽을 것을 ‘선택’하는 것은 다양한 매체가 없던 70년대부터 『책과 선택』이 줄곧 해 온 일이었다. 이기웅 이사장 역시 ‘‘종이책만이 전할 수 있는 메시지와 여운이 있다’’라며 이 매체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문자를 사용해 온 시간을 생각해 보면 지금 알고 있는 종이책의 형태로 출판물을 찍어내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디지털의 등장 이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출판물의 비중이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종이책은 고유의 가치를 가진다. 잘 만들어진 책에서 종이의 질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종이가 결코 저렴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가능하면 조금, 더 조금 찍어야 한다. 이번에 열화당에서 ‘이태준 전집’을 만들 때도 공들여 만들되 최소 부수로 제작했다. 출판할 때마다 가능한 한 조금 찍자고 다짐한다.
팬데믹을 겪으며 출판계는 또 한 번 격동을 겪었다. 비대면이 장기화되며 온라인 중심으로 독서 환경이 바뀌고 있고, 미디어 역시 영상 매체 위주로 변화 중이다. 월정액 독서 앱과 오디오북 역시 빠르게 대중화되고 있다. 오늘날 출판을 둘러싼 여러 지형이 한층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이기웅 이사장은 오히려 종이의 메시지를 보여줄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디지털로 갈 것은 빨리 보내야 한다. 많이들 ‘자리를 뺏겼다’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면 종이책만이 가지고 있는 임무를 확실하게 보여줄 시대가 온 것이다. 몇몇 일은 종이책으로 출판하다 보면 더디고 부정확해지는데, 이제는 전부 종이로 붙들고 앉아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기계가 날라야 할 정도로 무거운 책자들은 이제 실질적인 정보 전달 대신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종이책’은 수많은 정보를 알맞은 크기로 분절해 제대로 남겨내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산더미 같은 법률 서류를 예리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종이만이 해낼 수 있다. 종이의 메시지는 종이답게. 종이책의 원리에 집중한 출판이 필요하다.
종이와 디지털은 모두 정보를 나르는 매개체다. 그러나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은 둘 사이 확연한 차이가 있다. 지면 위의 활자는 눈을 피로하게 만들지 않아 오래 두고 읽을 수 있다. 활자의 배치 역시 바뀔 일이 없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 종이책의 저력이다.
영혼도서관, 삶을 되돌아보는 곳
이러한 종이책의 저력에 힘입어, 이기웅 이사장이 ‘편집자 길의 종착역’이라 칭한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영혼도서관의 자서전 쓰기 프로젝트다. 안중근기념 영혼도서관은 파주 헤이리의 꼭대기에 있다. 다만 독특한 것은 자서전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게 아니라, 쓰려는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기획된 도서관이라는 점이다. 헤이리가 본래 기획되었던 헌책 마을 ‘서화촌’에서 조금 먼 둘레길을 돌아 지금의 예술인 마을에 정착한 것과도 같이, 영혼도서관 역시 멈추지 않는 노력 끝에 지금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처음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에 부지를 기부하기로 했을 때부터, 이기웅 이사장은 ‘어떤 용도’로 건물을 지을 것이냐는 물음을 많이 받았다. 이에 그는 한 번도 답변을 바꾸지 않았다. 개인이 자서전을 쓰는 용도라는 것이다. 영혼도서관 기획의 골자는 ‘참된 책 만들기’이다. 등록을 한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도서관을 찾아 원하는 분량만큼 원하는 내용을 쓸 수 있다.
“다만 영원한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과 선함이다.”
이기웅 이사장에게 영혼도서관을 짓자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훨씬 오래전부터였다. 그 아이디어는 어떠한 고민과도 궤를 같이한다. 종이책이 더는 귀하지 않게 되고, 허영과 거짓으로 가득 찬 출판물이 범람하는 상황 속에서, 선하고 값진 책이란 과연 무엇 일지에 대한 고민.
영혼도서관이라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한 때는 상당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때는 우리가 전부 다 깜깜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 너무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젊은이든 나이가 많은 사람이든 간에, 인간의 기본을 갖추지 않은 어떤 것도 허무하다는 사실을 인생의 막판에 느끼게 되므로.
결국 한 인간의 생에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기웅 이사장은 오랜 숙고 끝에 ‘영혼’, 그리고 한 권의 자서전이라는 답을 얻어냈다.
모든 게 소멸을 향해서 간다는 현실을 조용히 받아들여야겠구나, 요즘 드는 생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게 있다면 무엇일지 자주 생각하게 된다.
종이책의 위기는 생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출판을 ‘업으로 삼는 것’과 장사를 목적으로 책을 내는 것은 명백히 다르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성장이 인류 전체를 낭떠러지로 몰아온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책은 인간에게 돈이라는 또 다른 욕망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기웅 이사장에게 자서전은 욕망을 채워주는 수단이 아니다. 선하고 값진 책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자서전 쓰기란 어떻게 이루어질까. 이기웅 이사장은 ‘자랑’이 아닌 ‘자기반성’의 태도로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안중근 의사가 온갖 고난 속에서도 변함없는 자세로 자서전을 써 나갔듯, 혹은 마크 트웨인이 본인의 사후 백 년 뒤를 기약한 자서전을 만들었던 것과 같이 써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도 스스로 자기 마음을 적곤 하지 않나. 실용적인 글이든, 문헌으로서의 기록이든 간에 특별한 목적을 가진 글이라면 여러 가지를 조사해서 써낼 것이다. 하지만 목적 없이 쓰는 때도 있다. 어떻게든 상황에 접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기 때문에, 쓰고 싶은 생각과 기록해 놓고 싶은 일들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일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다. 어딘가에 제출하기 위한 보고서를 쓸 때의 마음가짐과 개인적인 일기를 쓸 때의 마음가짐은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하물며 자서전이라고 다를까. 이 이사장에게 자서전이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완성되는 글이다.
내가 쓰는 이 글이 무엇인가, 왜 쓰는가를 처음부터 깊이 생각하며 자기반성의 글쓰기 버릇을 들여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점점 늘어서, 마침내 풍부한 모양새와 틀을 갖춘 글쓰기를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남의 글을 많이 읽어야 ‘나는 이렇게 써야 하겠다’라는 지혜가 터지게 되고… 한참 써 버릇해야만 쓸 수 있고, 읽어 버릇해야만 읽어진다. 틀이 망가진 내용은 지우고, 잘 됐다 싶은 부분을 남기면서 평생 가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실제 영혼도서관에서 쓰일 자서전들은 세상에 출판되지 않는다. 단 한 권의 책으로 남아, 도서관 안에 안치됨으로써 자서전은 그 의미를 다한다. 이렇게 독자를 상정하지 않고 쓰는 글이란 수없이 많은 숙고를 거쳐야만 한다고, 이기웅 이사장은 거듭 강조한다.
남에 대해서 쓰더라도 자신과 연관해서 써야 한다. 무슨 잘못 때문에 반성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터득하고, 자신을 알아내는 힘을 기를 수 있으니까. 나는 영혼도서관의 형식을 정해 두지 않고 건물 자체가 사람을 반성하게 만들기를 원했다.
한국의 책을 세계로, 라이프치히 도서전
출판도시를 일구고, 영혼도서관을 지어 낸 이기웅 이사장의 출판 일로에서 또한 빠뜨릴 수 없는 경험은 라이프치히 도서 박람회에 관한 것이다.
라이프치히 도서전 한국관은 한국 출판이 지닌 역사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기획되었다. 사단법인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가 2013년 문화부, 외교부의 지원을 통해 라이프치히 도서전에 한국관을 처음 열었을 때, 부스의 주제는 ‘한글과 세종대왕’이었다. 이러한 공간을 통해 한국관은 15세기 한글 창제를 통해 출판문화의 초석을 닦은 ‘세종대왕’과 성경의 번역을 통해 중세 개혁의 시작을 연 ‘마르틴 루터’를 연결 지었다. 라이프치히 도서전 한국관은 이후 12년 동안 한식, 한복, 한옥, 한국음악, 한국춤, 민예, 국토와 자연, 문학, 시각문화 등을 테마로 긴 호흡의 문화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책을 매개로 하는 교류다. 이기웅 이사장이 라이프치히 도서전을 회고하며 남긴 한마디는 ‘종이책의 가치’를 되새기게 만든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결코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디지털로 인해 아날로그가 더욱 단단해지고, 아름다운 아날로그로 인해 디지털이 더욱 예리해짐을 믿는다. 이것이 우리가 라이프치히로 향하는 이유다.
(이기웅 자서전 『출판도시를 향한 책의 여정』 중에서)
한국관 개관은 세계의 독자들에게 ‘한국의 책’에 대한 인식의 체계를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2024년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가 번역상을 받았다. 2016년 ‘라이프치히 도서전 수상작 프로그램에 한국의 출판사, 작가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널리 홍보할 필요성 또한 중요하다’라던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 사무국의 평을 돌아보자면, 이번 2024년의 수상이 새삼 놀랍다.
올해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는 도서 오백 여권이 출품되었다. 이 중 이기웅 이사장이 종이책의 본보기로서 꼽은 책은 세 가지다. 사진가 강운구의 『암각화 또는 사진』(뮤지엄한미, 2023)과 『상허 이태준 전집』(열화당, 2024), 최순우의 『한국미, 한국의 마음』(오뜨, 2024)이다. 각각의 도서는 사진집과 문학 전집, 한국미학책으로, 다루는 내용은 상이하지만 큰 뜻에서 맥을 같이한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종이책 안에 펼쳐내는 것.’
선사 시대 암각화 사진에서 시작해 우리 근대기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상기하게 되는 수려한 한글 문학 작품,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고 정의한 미술사학자의 미학 책은 그동안 축적해 온 한국문화의 깊이를 보여준다. (『라이프치히 도서전 한국관 저널 2013-2024, 한국문화 주요 문헌 목록 및 논설 모음』 중에서)
2013년부터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라이프치히 한국관은 선정된 주제에 따라 주요 도서를 비롯해 출품작 후보들을 고르며 ‘기록된 문헌’으로서의 한국 문화를 모아 왔다. 그 목록들을 읽어내리다 보면,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국의 뿌리가 눈에 잡힐 것만 같다.
출판도시만의 배움터,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
도서전 한국관이 열린 해는 출판도시가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디딘 해이기도 하다.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가 그 문을 연 것이다.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이하 PaTI ‘파티’)는 출판도시에 위치한 새로운 형태의 배움 공동체이다. 이들의 처음 목표는 다름 아닌 학교 자체를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파티 구성원들의 노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은 ‘호칭’이다. 이사장은 ‘엔담’, 학생들은‘배우미’, 교장은 ‘날개’, 부교장은 ‘버금’. 이사장의 존재가 배우미를 비롯한 파티의 모든 부분을 에워싸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엔담’이라 칭한다. 처음 접했을 때는 낯설게 느껴질 법도 한 호칭들이지만, 의미를 알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단순히 ‘교수’와 ‘학생’에서 의미를 치환한 것이 아니라, 위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창의적인 시도다. 이기웅 이사장은 2018년부터 파티의 엔담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파티의 배움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파티의 과정은 일반 대학의 학부 과정과 학업 기간이 비슷한 ‘한배곳’과 심화 과정인 ‘더배곳’으로 나뉜다. 타이포그피를 비롯한 디자인 수업을 주축으로 삼지만, 출판도시의 배움터인 만큼 인문학 수업 역시 빠질 수 없다. 일반 대학에서 다양한 교양 수업을 들으며 내면의 양식을 다지듯, 한배곳의 새내기들은 기초 조형뿐 아니라 연극과 시, 심지어는 여행을 통해 자신을 가꾸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이후 실기 워크숍으로 자신의 관심 분야를 더 알아가고, 졸업 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갈무리함으로써 한 사람의 어엿한 디자이너로 성장하게 된다.
2022년에는 단기 특별과정 두 가지가 신설되기도 했다. 스튜디오와 타이포그래피 교육이 주축이었던 기존 과정에 더해, 일러스트레이션과 영화 프로덕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PaTI.is와 PaPA가 그것이다. PaTI.is는 배우미와 스승이 1년간의 학습 계획을 수립한 후 개인의 작업에 보다 집중하는 과정이며, PaPA는 사단법인 한국영화미술감독조합과 협력하여 실무로의 연결에 집중하는 코스다.
영혼도서관이 반성을 이끌어내는 공간으로 기획되었듯, 파티의 공간 또한 배움을 돕기 위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작업 공간인 ‘이상집’부터 시작해 그 안의 ‘멋짓공작소’, ‘중간공간제작소’, ‘디자인싱킹연구소’까지. 모두 파티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뒷받침하는 기틀이다. 이곳에서는 스승과 배우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긴밀하게 의논하여 프로젝트에 가장 알맞은 방식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공간은 그 과정에서 유기적으로 협업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정된 강의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그려진다
. 배움은 어디에서나 같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내서 어떤 비전을 만드는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스스로 학생과 선생 사이를 넘나들었는데, 그게 곧 나의 교육관이었다. 내게 필요한 것을 어떻게 얻을지 공부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교육 아닌가?
파티가 기존 학교들과 다른 부분은 하나 더 있다. 바로 배우미와 스승 간의 상의에서 비롯되는 자율성이다. 이기웅 이사장이 출판도시를 일굴 때 의사소통의 원칙으로 삼았던 ‘전원 동의’의 민주주의가 이곳에서도 작동한다.
형식적인 다수결보다 마음을 비운 전원 일치야말로 민주주의의 꽃이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가 나오면 그만두면 된다.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협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왜 반대하는지 이유를 묻고, 해결하면 된다. 나는 이런 부분을 두고 출판도시의 민주주의에 관해서 말하고 싶다. 출판도시는 민주주의를 한다.
출판도시는 자란다
이기웅 이사장은 파티의 탄생을 ‘씨앗의 뿌리 내림’으로 회상한다. 출판도시의 미래를 책임질 학교가 빠르게 정착되어야, 이후에도 도시를 단단히 지탱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교육 공동체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당시, 이 이사장은 기대뿐 아니라 수많은 우려를 마주했다.
손익이 얼마인지, 얼마나 잘 될지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우리 출판인들은 이 학교를 어떻게 활용할까, 하는 것도 생각하다 보면 더욱 그 의미가 복잡해졌다. 그래서 내가 단순화시켰다. ‘우선 정착시켜야 뿌리가 빨리 내려진다’ 하고.
좋은 스승을 모시고, 배우미들이 생각을 펼칠 수 있도록 넓은 공간을 제공했다. 출판도시 전체를 무대로 하는 잔치를 열어, 디자인이 시와 음악 등 다른 예술 분야들과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시도했다. 출판사와 인쇄소, 영상 회사들이 한 곳에 모인 출판도시는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그 자체로 배움의 장이었다.
걱정들을 많이 했다. 이 공동체가 얼마나 오래갈까. 하지만 이런 물음은 대한민국이 얼마나 오래가겠느냐고 묻는 것과 같지 않나. 시대는 끊임없이 생명력을 갖고 흐르게 되어 있다고 낙관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고, 이와 달리 비관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두 가지 모두를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용기가 참 좋다고 생각한다.
2012년 문을 연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는 올해로 11주년을 맞이했다. 그간 파티는 배우미들을 모으고, 스승들을 각지에서 영입하며 귀한 배움의 기회들을 넓혀갔다. 이기웅 이사장이 강조하는 출판도시 정신 중 하나, ‘사람 농사’의 실현이다. 이렇듯 출판도시는 단순히 휴일에 놀러 오기 좋은 공간으로 머물지 않는다. 계속해서 뿌리를 뻗어나가며,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단단히 표착할 모판으로 다음 십 년을 준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