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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균지 Sep 26. 2024

[111호] 더 넓은 사랑을 찾아서

수습편집위원 정태건


 지난 3월 27일과 28일 양일에 걸쳐 2024 금잔디 문화제 ‘사랑합시다’가 진행되었다. 금잔디 문화제는 매년 3월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에서 진행되는 봄 축제다. 이름과 같이 금잔디 잔디밭 공간을 활용하여 여러 부스와 돗자리 존을 운영한다.  이번 ‘사랑합시다’의 슬로건은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시나요?”로 시작하여 ‘사랑’의 대상을 “연인, 친구, 가족, 음악, 영화, 일” 등을 거쳐 종내 “세상”으로 확대했다. 슬로건을 활용하여 총학생회에서는 각자의 ‘사랑 이야기’를 적는 부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금잔디 영화제에서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이 상영되었다. 두 편 모두 인기 있는 로맨스 영화다. 어둠이 내린 저녁 금잔디에 옹기종기 모여,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로맨스 영화의 불빛에 젖어 드는 금잔디 문화제는 비단 올해 ‘사랑합시다’뿐만 아니라 언제든 캠퍼스 로맨스라는 낭만을 표상하는 듯하다.

 그러나 문득 이러한 캠퍼스 로맨스, 다시 말해 학내에서의 ‘사랑’이 이성애에 국한되어 이야기되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시스젠더[1]이자 이성애자가 학내 구성원 중 다수를 차지하겠지만, 그 바깥에 있는 이들의 연애 혹은 사랑도 학내에서 이야기될 수는 없을까? 성소수자는 학내에서 오가는 연애담 내지는 사랑 이야기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다섯 명의 성소수자/비성소수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학내에서 정의되는 ‘사랑’, 그중에서도 ‘연애담’은 어떤 형태이고 또 어떻게 위험한가.


*아우팅 방지를 위해 인터뷰이의 학번을 제외한 다른 정보는 밝히지 않습니다.


(1)   학내에서의 연애담은 어떻게 소비되는 것 같나요?

학교뿐만 아니라 작은 사회 어디서든 ‘남의 연애 이야기’는 가십처럼 소비되고 또 빠르게 잊히는 것 같아요. (A, 18학번 재학생)
‘누가 누구랑 사귄다.’, ‘누가 누구랑 사귀다가 헤어졌다.’ 같은 대화를 자주 나눠요. 최근에는 연애 프로그램이 유행하면서 프로그램 안팎의 이야기를 자주 하기도 하고요. MBTI를 기반으로 각자의 이상형이나 연애 성향 이야기도 많이 나누는 것 같습니다. (E, 22학번 재학생)

학우 간 서로 알아가기 시작하는 사이에 비교적 편하게 교제 중인 이성 친구가 있냐고 물어보는 분위기 같아요. 연애담을 나누는 게 상대방과 친해지기 위해서 터놓는 하나의 의례처럼 여겨지는 거죠. 요즘 들어서는 상대방이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굳이 묻지 않는 매너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듯하기도 합니다. SNS를 통해 연애하는 티가 나는 스토리나 피드를 보면 은근슬쩍 물어보는 정도.

시시콜콜한 연애담은 학내에서 자주 오간다. ‘대학 가면 연애할 수 있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철석같이 믿고 공부한 사람들, 학창 시절에 몇 번의 연애를 거치고 대학에 온 사람들, 그리고 이미 연인이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비슷한 수준의 성적과 비슷한 분야의 관심만으로 같은 대학에 있으나 서로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서로의 배경이 얼마나 새로운지 깨닫기 일쑤다. 이때 연애담은 각자의 사랑이 얼마간 닮았다는 까닭에 우리를 한 데 묶어주는 것 아닐까. 지난 몇 년 사이 화제를 모은 각종 연애 프로그램의 역할도 한몫 있을 것이다. ‘하트 시그널’부터 ‘나는 솔로’까지, 우리는 남의 연애를 살피며 이리저리 말을 주고받는 문화에 익숙해졌다. 상대방의 애인 유무를 따지지 않더라도 저 유명한 연인들의 연애담은 쉽게 화두에 오른다. 그런데 그 연인들, 모두 이성애자다. 학우들은 어떻게 느끼나.


(2)   학내에서의 ‘사랑’ 또는 ‘연애’가 이성애 중심으로 이야기된다고 느끼나요?

자주 그렇게 느껴요. 공식적인 행사나 홍보 게시물에서 이성애 외의 사랑은 등장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런 (이성애 중심적인 이야기들만이 오가는) 문제에 봉착하면 가시화의 범위 내지는 수준을 고민하게 됩니다. ‘남자 친구 - 여자 친구’ 도식이 너무 견고한 탓에 성소수자는 등장할 곳이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다양성을 인정하는 성균관대학교라고 하지만 학교가 과연 어떠한 다양성을 수용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곤 합니다. (B, 23학번 재학생)
이성애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정도를 넘어서, 동성애는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걸 들어본 경험 자체가 아주 적은 것 같아요. 또 그러한 경험도 당사자인 친구가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고백하는 개인적인 대화였고요. (A, 18학번 재학생)  
아무래도 그렇게 느껴요. 저는 퀴어 당사자다 보니까 항상 연애담을 얘기할 때 어디까지 오픈할지 고민하는데, 그러다 보면 상대방도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는 자세로 대화해주고 있는지 아닌지 너무 잘 보이거든요. 하다못해 여자 친구/남자 친구 라는 구체적인 단어가 아니더라도 만나고 있는 사람이 특정 젠더라는 걸 못 박아 두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있죠. 애인의 선물 이야기나 데이트 얘기를 하다 보면 특히 공고화된 성역할이 있잖아요. (D, 20학번 재학생)


(3)   여자 친구’ 또는 ‘남자 친구’의 유무를 묻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그런 질문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나 우려를 느끼나요?

많죠. 그냥 우리를 이성애자로 여기는 게 너무 기본값이구나 싶어요. 이런 부분은 사실 우리 대학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적 분위기라 저는 많이 무뎌진 것 같아요. 딱히 감정이 상하지는 않아요. 좀 아쉽긴 하죠. 상대방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정말 많이 사라지니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못 친해지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자 친구 여부를 묻는 말보다 더 아쉬운 부분은 상대방이 이성애 중심 연애의 문법들에 익숙한 채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경우예요. 그런 문법에 익숙하고 또 그게 당연한 사람은 제 입장에선 꽤 전형적이고 성차별적이거나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대화를 이끌어 가기도 하고요. 사랑과 연애에 대한 대화는 세상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이성애 문법에 너무 매몰되면 학우 간 무신경하고 무지한 걸 넘어서 은근한 폭력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 같아요. (D, 20학번 재학생)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보통 그런 질문을 듣죠. 자리마다 질문이 나오는 맥락도, 온도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친밀한 사이에서 건네는 질문에는 별 생각이 들진 않아요. 그냥 적당한 답답함 정도. 저는 오픈리[2]는 아니어서, 상대방에게 커밍아웃을 하지는 않았지만 연애 이야기를 할 만큼 친밀한, 그런 관계들이 있는데, 그 때 어디까지 나의 정보를 공개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래도 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답답함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청춘이라면,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이성과 연애를 하고 싶은 열망, 이성 연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전제를 두고 진행되는 행사나 대화는 복잡한 감정을 들게 해요. 너 남자 친구 없어? 보다는 남자 친구 사귀고 싶지 않아? 가 더 불편한 질문이 되거든요. 답변이 아니라 해명을 해야 하니까요. 어떤 분위기가 누군가를 항상 해명을 요구하는 위치에 내모는 것이 우려되는 점이죠. (C, 21학번 재학생)
자주 들어봤어요. 그런 질문을 들으면 웬만하면 애인이라는 단어 뒤에 숨으려고 했어요. 그런 질문들을 자주 마주하게 되는 까닭은 성균관대학교의 미비한 젠더 교육에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젠더 관련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학과도 거의 없고요. 이성애 외 다른 형태의 사랑들을 가시화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작금의 분위기가 유지된다면 젠더 및 성 정체성과 지향성을 배려하는 분위기가 학내에 형성되기는 굉장히 힘들 것 같아요. 학내 소수자들이 학교에 결속감을 느끼기는 더욱 어렵겠죠. 학교라는 공간이 누군가는 배제되고 있다고 느끼는 곳이 되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저는 학교가 전체적으로 바뀌어야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기 위해서는 학우들의 변화가 먼저 요구되는 부분이 있죠.  (B, 23학번 재학생)

 사람 간 사랑, 연애 혹은 성적 끌림이 쉽게 드러나는 장소 중 하나가 클럽이다. 수많은 클럽이 밀집된 이태원에 가면 대로를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시스젠더-이성애자들을 위한 클럽 거리를, 남쪽으로는 성소수자들이 모이는 클럽 거리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분리된 까닭은 우리가 상대방의 외면만으로는 그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데 있을 것이다. 성적 지향을 기준으로 특정 클럽의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는 파트너에 따라 이용자가 클럽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종종 문란하고 위험하게만 비치며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클럽 문화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이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모순되게도 정작 숨이 턱 막히는 건 일상이다. 당신이 여성/남성을 좋아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들. 성소수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틈이 없다고 느낀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B 학우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주고받는 이야기는 물론, 실생활에서 접하는 ‘연애’는 대개 이성애를 다룬다. 비단 학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지자체나 기업이 제시하는 콘텐츠 및 프로그램에서 얼마나 자주 성소수자를 마주했는가? 그들은 ‘논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이른바 ‘보편적인’ 연인을 소환한다. 실제로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콘텐츠에 성소수자가 등장하면 논란이 된다. 정치적 올바름(PC)[3] 의 과도한 적용이 콘텐츠의 질을 해친다는 논리다. 원래 이성애자인 캐릭터가 갑자기 게이로 등장하고, 원작에서는 남성이 맡았던 역할을 영화에서 여성이 연기하게 되면 대중은 콘텐츠를 즐기거나 몰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까? 우리 삶에서 이성애자인 줄 알았던 누군가가 자신이 동성을 좋아한다며 커밍아웃[4]하고, 생물학적 성별이 남성이었던 누군가가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한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성소수자 콘텐츠를 거부하는 이들은 성소수자가 사회에 노출되면 안 된다는 주장을 기저에 둔다. 이렇게 (그들을 존중하지만) 성소수자가 자신 앞에 드러나지 않았으면 한다는 식의 요청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든 폭력이다. 어떤 정체성을 지닌 누군가가 그들의 정체성으로 인해 타인의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간다면 같은 인간으로 존중받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노출은 꽤 중요한 문제다. D 학우의 경험처럼 누군가를 특정 젠더로 또는 이성애자로 쉽게 정의하게 되는 까닭은 그렇게 생각하는 당사자가 못되고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노출과 교육 부재의 결과일 공산이 크다. 내 곁의 누군가가 성소수자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는, 앞서 살폈듯 이성애 중심의 연인과 연애담이 주로 소비되는 이 사회에서, 개인의 모자람으로 인한 것으로 해석되기 어렵다. 그보다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야기하는 구조적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란 이성애자 남녀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형태의 가족만을 이상적인 집단으로 이해하고 다른 형태의 가족을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인식 내지는 구조다. 이러한 인식은 비혼주의자는 물론 성소수자에게도 폭력적인데, 특정 젠더에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는 무로맨틱(Aromantic) 성향의 사람이나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다자연애자(Polyamory), 법적으로 혼인이 불가한 동성애자 등 ‘정상 가족’을 구성할 수 없는 이들을 사회 바깥으로 내몰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시스젠더이자 이성애자일 것으로 고정하는 태도는, 다들 그렇듯 당신 또한 이성을 사랑할 것이라고 믿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이성애 연애담과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사회에서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이유로 차별을 감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요한 것은 노출, 다시 말해 성소수자의 가시화다. 여기 성소수자가 있음을 알릴 방법은 많다.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공공기관의 홍보물,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다루는 교과서 등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성중립화장실[5] 개설은 성소수자 인권 보장의 한 단계이자 효과적인 가시화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 말고도 자신의 젠더를 특정하지 않는 논바이너리,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이 다른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성별이 있음을, 나아가 누군가의 성별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다. 이 밖에도 공개 석상에서 레이디스, 젠틀멘 앤드 아더스(Ladies, gentlemen and others)와 같이 제3의 성[6]을 호명하는 일, ‘성소수자/비성소수자 신입생 모두 환영한다’는 문장이 적힌 입학 축하 현수막 등 성소수자의 존재를 드러낼 방법은 많다.

 성소수자의 존재가 사회 곳곳에서 가시화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다양한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성소수자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사회 구성원들이 그들을 ‘이상하고 낯선’ 존재로만 대한다면 어떨까. 가시화와 함께 필요한 것은 성소수자에 대한 정확한 이해 그리고 이해를 바탕으로 한 배려다. 다시 인터뷰이들에게 물었다. 성소수자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용어나 태도에는 무엇이 있을까.


(4)   여자 친구’ 또는 ‘남자 친구’ 있느냐는 물음 대신, 대안이 되는 용어나 태도에는 무엇이 있나요? 

애인이라는 단어가 좋은 용어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성별이 지정된 단어가 아닌, 애인, 만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등의 용어 사용이 좋아요. 남편/아내 대신 배우자/파트너라는 용어를 쓰는 것 역시 좋습니다. (B, 23학번 재학생)
아무래도 성별을 특정하는 물음보다는 ‘애인’이라는 말이 대안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저는 개인의 성 정체성, 성적 지향에 대해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Don't ask, don't tell)”는 분위기보다는, 개인의 정체성이 학교 커뮤니티 내에서 다양성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A, 18학번 재학생)
애인이라는 용어가 좋죠. 제 친구들, 주변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쓰는 것 같아요. 상대방의 성적 지향을 단정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보이는 친구들도 많이 있고요. 그런데 저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대학생이면 으레 연애할 것이다, 혹은 연애하고 싶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또 저 같은 경우는 애인이 이성애자고 이성이기에 다른 친구들과 쉽게 이성 연애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저의 정체성이 시스젠더, 이성애자로 패싱되어 아쉬운 부분이 있어요. 저의 정체성을 전에 콱 막히는 기분이 들죠. 상대방의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단정하지 않는 것, 나아가 이야기하기도 그것을 내가 아직 모른다는 생각 혹은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상대방이 범성애자일 수도 있고 무성애자일 수도 있으니까. (E, 22학번 재학생)



어떤 태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문화의 영향이 클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변화를 모두에게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일은 사회 전반에 걸친 문화를 바꾸는 일보다 쉽다. 당신의 성적 지향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당신을 아직 다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E 학우의 말처럼 상대방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단정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기다리는 태도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태도는 사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배려이기도 하다.

나아가 학내에서 ‘사랑’ 또는 ‘연애’가 이성애로 한정되어 이야기되는 까닭은 물론 우리가 서로를 이성애자로 생각해서도 있겠지만, 동성애자, 범성애자, 무성애자 등 다양한 성적 지향을 타인에게 공개했을 때 사회로부터 그리고 학내 커뮤니티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현실의 무게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혔을 때 ‘자신은 성소수자가 싫다.’ 또는 ‘동성애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식의 반응은 당연히 중대한 폭력이지만, ‘네가 그럴 줄 몰랐다.’ 내지는 ‘당연히 이성애자인 줄 알았다’는 식의 반응 역시 성소수자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이성애 중심의 연애담은 성소수자에 대한 무관심의 방증이자 성 정체성, 성적 지향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안전하지 않은 사회의 결과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안전한 사회 그리고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앞선 인터뷰에서 나온 이야기들처럼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짧은 인터뷰이지만, 누군가에게 노력의 출발점이 되는 기사이기를 바라며 맺는다. 



[1]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지정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별 정체성’을 동일하게 감각하는 사람

[2] 자신의 성 정체성, 성적 지향 등을 사회에 드러내는 성소수자들을 지칭한다.

[3]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 및 활동을 교정해야 한다는 신념 또는 그 신념을 바탕으로 행해지는 활동을 일컫는다.

[4] 커밍아웃은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타인에게 밝히는 행위를 말한다.

[5]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로 분리되지 않고 모든 성별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 

[6] 제3의 성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사회적 성별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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