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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균지 Sep 11. 2024

[111호] 성숙을 향해 달려가는 미성숙한 우리는

대학생 릴레이 인터뷰

스무 살 생일 케이크 초를 불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고작 하룻밤 사이 얼떨결에 넘어서게 된 미성년과 성년의 경계,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가까스로 뛰어넘을 수 있었던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경계. 쉼 없이 달려온 끝에 맞이한 대학 입학은 경주의 끝을 알리는듯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결승선이라 믿었던 경계선은 이제는 어른이 될 차례라며 새로운 경주의 출발선으로 둔갑해 있었다. 나는 또다시 대학생과 사회인의 경계를 넘음과 동시에 미성숙과 성숙의 경계선을 넘기 위한 경주에 돌입해 경쟁의 발걸음을 떼어야 할 것만 같았다. 

대학의 문을 넘기 위해 국어, 수학, 영어, 과목별로 정해진 점수나 등급을 목표했듯, 어른의 경계를 넘는 것도 누군가에 의해 이미 일률적으로 정해진 명확한 항목과 기준치에 내맡겨져 앞만 보고 달려 나갈 수 있길 바랐다. 순간순간의 성과가 손에 쥐어지기를, 결승선까지 남은 거리가 내 눈에 분명하게 보이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어른을, 성숙을 향하는 경주에는 어째서인지 내가 밟아야 할 트랙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맞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는지 앞서고 있는지 전부 알 수 없었다. 커지는 불안감에 스스로의 성숙도를 점검하기 위해 그 기준을 찾아 저명한 문헌이나 사전적 정의 따위를 뒤적였다.  

현존하는 연구 결과들은 성숙의 정의나 기준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취했지만, 그중 공통적인 시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성숙성은 개인의 심리 내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 양측에 있어, 그 가능성과 적응성을 모두 탐색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고려하여 밝혀진 이론적 영향 요소를 최대한 포괄하려는 시도 끝에 6가지의 요소를 척도로 삼았다. 정서적 성숙 면의 애착 관계, 자아 표출 능력, 가치관 확립, 그리고 사회적 성숙 면의 경제력, 진로 계획 이행 현황, 사회규범 인식이 그것이다. 

위 6가지 기준을 토대로 나 자신을 육각형 그래프로 묘사하고, 그 면적을 살피며 스스로의 성숙을 측정해 보았다. 이에 따른 결괏값은 과연 나의 현 위치를 나타내 성숙을 향한 여정의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을까. 애초에 성숙을 향하는 길에 정도(正道)란 존재하는가. 누군가 나의 길잡이가 되어줄 순 없는 건지. 내가 본 어른들은 다들 어떤 경로로 성숙에 도달했길래 나는 이토록 헤매고 있는 것일까. 똑같이 성숙을 향해 달려가는 같은 경기 참가자들 중 나와 달리 스스로의 상태를 긍정하는 이들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스스로의 미성숙한 모습을 긍정하며, 자신만의 경로를 설정할 수 있었냐고. 그 답을 찾아 본교 학우들이 들려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았다.    


  

자기 자신과 타인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싶어요. (20학번, 9학기 재학 중) 

자기 자신을 돌보려면 일단 자기 상황을 잘 알아야 하죠. 나에게 주어진 온갖 부수적이고, 하찮고, 사소한 일들이 너무나 귀찮고 불쾌하게 느껴지더라도 도망치지 않아야 하고요. 도망치지 않는 것에서 나아가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느끼고 정성을 쏟을 줄 아는 사람들을 보면 진짜 성숙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TV를 보다가 우연히 집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아침을 차려 드시는 걸 보면서 감동을 한 적이 있어요. 매일 두 분이 아침밥을 너무 정성스럽게 차려 드시는 거죠. 그때 저런 모습이야말로 성숙하게 삶을 대하는 방식일 수 있겠구나 깨달았어요. 반면 아침을 거르는 경우가 다반사에 먹는다 해도 시리얼로 대충 때우곤 했던 내 모습을 돌아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아침밥을 정성스럽게 차려 먹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죠. 제 자신 그리고 타인을 섬세하게 돌볼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에요. 

지키고 싶은 것에 진심을 다하려면 연습이 필요해요. 

지금도 성숙하려면 멀었지만, 제가 완전히 미성숙했던 과거에서 성숙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던 순간들이 몇 가지 기억에 남는데요. 저의 미성숙은 반항심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키지 않는 일을 대할 때면 반항심부터 일었고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의문하느라 많은 시간을 소모했거든요. 재수가 미성숙에서 벗어난 시작점이었던 것 같아요. 하기 싫은 일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거든요. 공부하기에 앞서, '내가 왜 매일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지?'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더라고요. 하지만 어느 순간 제가 아무리 고뇌하고 거부해 봤자,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저는 여전히 그 일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고통만 배가될 뿐이죠. 제게 주어진 의무를 도망치지 않고 받아들였을 때부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어요. 환경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제 마음가짐이 달라지니까 상황이 한결 나아졌던 거죠. 해야 하니까 하는 관성이 저한텐 오히려 잘 먹히더라고요. 제가 생각하는 성숙의 조건 중 환경을 수용하는 법을 깨우친 계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후 대학 단체 활동을 하면서, 재수 때의 제가 체념으로 넘겼던 근본적인 의문을 해소하는 순간이 찾아왔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제가 감당해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는 거였어요. 제가 이끄는 단체에 너무나 큰 혼란이 찾아왔을 때, 원래의 저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일이지만 해내야만 하는 일들이 쏟아졌어요. 제가 내키고 말고를 떠나서, 저라는 사람이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시험에 든 것만 같았어요. 제 능력을 적나라하게 평가받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저의 부족함 역시 드러날 수밖에 없었죠. 어른들이랑 얘기하다 보면 무력감에 그만 혀를 깨물고 싶은 순간도 있었어요. 제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줬고, 그래서 이 이상 할 수가 없는데 제가 보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니까 좌절감을 느꼈어요. 내가 아직 어려서인가, 대체 어떤 부분에서 미성숙하길래 여기까지 밖에는 안 되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심정이었죠.  

바로 그때, 제 자신의 한계를 확인한 동시에 열의가 일더라고요. 이 일을 내가 사회에서 겪었다면 어땠을까. 앞으로의 남은 삶도 언제나 순탄할 수만은 없다는 현실을 체감했죠. 언젠가 또 물러설 수 없는 순간들, 싸우듯이 살아야만 하는 순간들이 올 때, 제대로 대처할 수 있으려면 작은 것에서부터 차근차근 갈등을 다루는 법을 익혀야 하겠다는 필요를 절실히 느꼈어요. 계속 물러서다 보면 내가 정말 지키고 싶은 게 있어도 지키지 못하게 되어버리니까요. 그렇게 제 성숙의 방향이 잡혔어요. 불필요한 감정에 제 자신을 소모하지 않고, 지키고 싶은 일을 위해 온 진심을 다하자고 다짐했죠. 그제야 제가 바라본 어른들의 마음가짐이 이해되더라고요. 삶의 모든 일과 갈등에 있어 경시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시간과 노력에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이유를요. 그분들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수용력, 집중해야 할 일을 파악하는 선별력, 또 그에 몰두하는 문제해결력 모두를 갖추고 계셨어요. 이러한 성숙이 아침을 차려 먹는 사소한 일에서마저 진심을 다하는 모습으로 표출된 거죠. 외면하고 싶은 일을 직면하고 몰입하는 모습이 제가 목표하는 성숙이에요.   

과적응이 오기 전, 지금의 미적응을 즐기면 안 될까요? 

지금의 저를 스스로 평가하자면 미성숙한, 사회에 미적응한 상태에 있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부적응까지는 아닌, 미적응의 단계까지 온 거 같아요. 그런데 과적응이라고 할까요, 사회에 나가서 사회적으로 과성숙해질 내 모습을 가늠해 봤어요. 그때의 내가 과연 삶을 버틸 수 있을지, 내가 그때의 나 스스로를 괜찮게 평가할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어른’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와 지금의 제가 보는 제 자신은 괴리가 크죠.  

후배들에게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려 애쓴 흔적이 보이는 문자를 받을 때면 몸에 알레르기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곤 해요. 어릴 때부터 줄곧 어른분들께 어른스럽다는 평가를 받으며 살아왔거든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너는 참 허튼짓하지 않을 것 같고 진중해 보인다고들 하셨죠. 그럴 때면 솔직해지는 게 낫다 싶어 제가 먼저 “아니요. 저 부족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라고 말씀드리곤 했어요. 고작 이 정도의 시선도 아직 버거운데, 언젠가는 사회에 나가 1인분의 역할을 도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른이 되는 시기를 앞당기고 싶진 않아요.

성숙해지기 싫다는 건 아니에요. 언젠간 저도 제 영역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존재하죠. 다만 성숙하지 않은 시기에 최대한 많은 경험과시행 착오를 겪어보고 싶어서, 미성숙한 저를 굳이 닦달하고 괴롭히지는 않으려고 해요. 성숙하지 못하다고 해서 뒤처지고 있다는 초조함이라든지, 어서 부족을 채우려 애써야 한다는 급박함이라든지 하는 감각이 대학생의 저에게는 없어요. 지금의 미적응이 고쳐야 하는 잘못은 아니니까요.  대학이 학생들의 성숙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실패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 봐요. 저 역시 실패를 통해서 성숙할 수 있었거든요. 학생 단체의 일도 그렇고, 마지막 학기에 훌쩍 떠난 교환학생에서 해외살이가 저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진로 선택지 중 하나를 제외할 수 있었죠. 그 모든 경험이 제 성장에 유의미한 기회였어요. 앞으로도 실패가 용인되는 시기를 즐기고 다양한 기회들에 진심으로 몰두하면서 제 자신을, 또 타인을 돌보는 법을 배워 나가려 해요. 


성숙은 솔직함에서 비롯되어 여유로움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19학번, 7학기 재학 중) 

어떤 사람을 성숙하다고 느끼는지 생각해 보자면, 혜화동 오소파스타 사장님 부부의 여유로움이 바로 떠오르네요. 두 분께서는 평일에는 화방을 운영하시고 주말에는 파스타를 판매하시는데, 제가 그 식당의 단골손님이거든요. 판매 목적보다는 신선한 재료로 만든 좋은 음식을 손님한테 먹이고 싶은 일념 하나로 장사한다고 느껴지는 곳이에요. 한가로운 분위기에서 손님들한테 말을 거시기도 하고 고민 상담을 해주시거나 본인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하죠. 어떤 상황이든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에서, 성숙하다는 감상이 직관적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어요. 타인의 과격한 말이나 행동에도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줄 알고,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이해와 베풂을 실천할 여유가 있는 사람. 이것이 제가 정의하는 성숙의 이상이 되겠네요. 

이처럼 타인을 향한 이해와 공감의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의 말과 행동에 있어 꾸밈없이 솔직할 수 있는 능력이 뒤받쳐주어야 하겠죠. 우리가 쉽게 솔직할 수 없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봐요. 미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부족에 대한 부끄러움. 무지를 인정하는 건 두려운 일이고, 부족함을 인식하는 건 때로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도 하잖아요. 마음속 허영이나 열등감이 고개를 들 때면 괜한 아는 척을 해댄다거나, 자기 과시를 하는 식으로 표출하게 돼요. 전부 미성숙의 표상이죠.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해야죠. 

저에게 성숙은 제가 솔직할 수 없는 원인을 극복함으로써 시도될 수 있어요. 먼저 솔직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같은 책을 읽어도 8살 때 읽은 책이랑 30살 때 읽은 책이 다르다고들 말하잖아요. 우리가 무엇을 알고 공부하는지에 따라서 같은 대상을 봐도 생각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겠죠. 이처럼 공부와 경험이 선행되어야 의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표현할 줄 알게 되면서 솔직한 사람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둘째 누나랑 같은 방을 썼었는데, 자기 전 각자 침대에 누워서 누나와 나눴던 얘기들이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어요. 제가 겪지 못했던 소수자의 입장이라거나 사회 각계각층의 일들을 전해 듣다 보니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좁은 식견이 많이 깨졌거든요. 한 번은 누나를 따라 이화여대 탐방을 하던 도중 부정 입학 관련 시위를 구경한 적 있는데, 학생회관에서 맡은 일을 다하면서 평화롭게 시위를 이어가던 모습이 제 뇌리에 깊게 박혔어요. 이런 게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집단행동이구나. 그날을 계기로 그 일원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제 공부의 첫 동력이 되어주었어요. 

이후의 공부로 저의 성숙함이 급증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무지를 받아들이고 두려움 대신 겸손을 느끼면서 점차 솔직해질 수 있었던 것이죠. 예를 들면 대학에서 교수님들의 수업을 들을 때, 저는 토론이 있을 때마다 주류 의견의 반대편, 그러니까 소수의 입장을 대변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지나칠 만큼 확신에 차서 얘기했던 것들이 언제나 진리는 아니었겠죠. 교수님이 말을 몇 마디만 얹으셨어도, 제 아는 척은 쉽게 탄로 나고 말았을 거예요. 지난날의 모습을 재고하면서 겸손해야겠다고 많이 성찰했던 것 같아요. 이렇듯 공부를 하면 어쩔 수 없이 겸손해지잖아요. 나 왜 이렇게 바보 같지, 하면서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다가갈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또 공부에 매진할 수 있고, 선순환이 이뤄지는 것이죠. 

이제는 타인 앞에서도 꾸밈없이 솔직해지기를 목표해요. 

다음으로 나도 다른 사람을 솔직함으로 이끌어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이 있어요. 솔직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면도 있지만, 대인관계에서의 경험도 큰 영향을 미치죠. 제가 용기 내어 솔직하게 말한 내용을 덤덤하게 들어주는 사람 앞에서 제 자신이 솔직해질 수 있더라고요. 

그 경험이 되게 귀했어요.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반응이 두려워 나를 꾸며내곤 했던 제 자신의 방어기제를 내려놓을 수 있었거든요. 내가 솔직해도 괜찮구나 안심하게 되면서, 그 사람 앞에서만큼은 솔직한 제가 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런 부분에서 저 역시 스스로를 미성숙하지만, 다른 대학생 친구들에 비해 성숙에 가까운 편이라고는 생각하는데요. 아마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 의식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판단을 덜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주변인들이 저에게 상담을 종종 요청하기도 하고, 성숙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거든요. 

또 앞으로도 제가 관계에서 부끄럽지 않게 솔직하기 위해서는 부족을 채워나갈 필요도 있겠죠. 저는 지난 저의 연인관계에서 미성숙한 모습을 자주 보였던 것이 후회로 남아요. 전 연인은 직장인의 신분이었는데, 직장인과 학생 간의 관계에서 상당한 차이를 절감했고 이 때문에 심한 불안함을 느꼈었거든요. 아무래도 제가 남성이다 보니, 제 부족한 위치에 대한 강박이 더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분 주변에는 직장인 남성분들이 많을 테고 전 막 군대를 전역한 대학생이라는 점이 스스로 비교됐어요. 나는 사실 굉장히 열등한 위치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진 탓에 제가 그 관계에서 잘못된 선택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이런 불안감을 해소하려면 조금이라도 동등한 입지를 형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먼저 직업적인 안정을 갖춰야겠다 싶었죠. 창업의 꿈을 접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어요. 저에게는 연인과 형성하는 애착 관계가 가족관계랑 비등할 정도로 삶에서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갖거든요. 애착 관계와 직업적 자아실현의 중요성을 비교했을 때도 거의 100대 0이라고 할 수 있죠. 일단은 직업을 가지면 그 직업이라는 항목에서는 제 열등감이 줄어들 테니 직업을 빨리 이루고 싶었어요. 그런데, 직업적 열등감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과연 애착 관계에서 성숙해질 수 있을까요? 연봉이라든가 아니면 외모적인 거라든가, 선형적으로 줄 세울 수 있는 것들에서 상대방과 차이가 벌어지면 결국 저는 또 불안감을 느낄 거예요. 불가피하죠. 이 불안감을 없애는 법은 앞으로 더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먼저 저부터 제 자신의 부끄러운 부족을 담담하게 받아줄 줄 알아야 하겠죠. 타인, 그중에서도 애착 관계의 상대를 대함에 있어 부끄러움 없이 솔직해지는 것이 제가 목표하는 성숙에서 저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가 아닐까 싶네요.  

성숙은 제 목표이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이상이지 않을까요?

우리는 그저 한평생 미성숙의 상태에서 성숙을 향해 정진할 뿐이죠. 제가 생각하는 성숙에는 겸손이라는 개념이 포함되기 때문이에요. 겸손을 지키는 한, 감히 스스로에 성숙하다는 평을 내릴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네요. 한편 이것이 제가 스스로의 미성숙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해요. 저 역시 영영 미성숙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지금의 결핍들을 채우고 나면, 나 홀로 완전해질 수 있겠죠. (22학번, 4학기 재학 중)

요즘 말로 하자면, 저의 추구미는 육각형이에요. 그것이 정말 완벽한 이상향이다, 최고의 인간상이라 하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저 저에겐 부족한 걸 채우고 싶은 욕구가 기질적으로 내재하여 있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다재다능한 사람이 멋있어 보였고 저 또한 그렇게 되고 싶었어요. 공부할 때도 성적이 잘 나오는 과목에 강점을 두는 것보다 못 나오는 과목에서의 분발을 우선했던 기억이 있네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가지의 강점은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갈수록 느끼는 건 그것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는 거예요. 강점을 내세우는 것만큼이나, 약점을 감추는 것 또한 중요하거든요. 제가 정의하는 성숙에 닿는 길은 달리 말해 독립 개체가 되는 과정과도 같아요. 예를 들면 아직 어린 연인들은 헤어지면 죽고 싶어 하고 그렇잖아요. 애착 관계에서의 결핍이 그들을 자유로울 수 없게 하죠. 그런 의미에서 나만의 온전한 육각형을 채워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면, 여러모로 홀로 존재할 수 있는 독립 개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깔끔하게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 저에겐 어른, 성숙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 같아요. 모든 부분이 균등하게 성장하고 난 뒤에, 모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제 모습을 고대하고요. 때문에 저는 작더라도 육각형의 형태를 그리면서 차근차근, 균형 있게 성숙해지려고 노력 중이에요. 

성숙한 사회적 자아와 미성숙한 정서적 자아, 지금의 저는 그런 식으로 존재해요. 

저의 얘기를 하자면, 저는 제가 나름의 육각형을 이루는 것에 성공했다고 봐요. 문제는 그것이 외적으로 보이는 제 모습, 사회적 자아에 국한된다는 것이죠. 보내주신 사전 질문지를 작성할 때도 고민이 많이 됐어요. 저의 보이는 사회적 자아와 내면의 정서적 자아는 상반되는 경향이 크거든요.  

더욱 성숙한 제 사회적 자아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면, 대학 내 단체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험들이 제 성숙의 자양분이 되어주었어요. ‘사회에서의 나’는 어떠한 것들을 해내야 하는지 분명하게 인식하는 계기들이 많았죠. 일례로 원어 연극을 준비할 때는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하나의 결과물을 내면서 공동체와의 협업을 배울 수 있었어요. 외에도 저의 의견을 확실히 표출하는 법, 갈등 상황을 다루는 법 등을 얻어가며 조금씩 저만의 육각형이 확장되었죠.  

현재는 단과대 학생회 국장직을 맡고 있는데, 리더로서의 책임감을 실감하기 때문에 언제나 흔들림 없이 안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편이에요. 저의 사적인 상황이나 체력적 한계가 닥치더라도 제가 주도하는 회의에는 영향이 없도록 할 자신이 있어요. 필요하다면 주류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내는 것에도 무리가 없고요. 저의 능력, 역할에 대한 기대나 부담에도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어쨌든 저는 제 몫을 다할 뿐이죠. 목표했던 대로 타인에게 연연하지 않고 이상적인 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덕분에 실제로 남들의 평가에서도 사회 활동을 할 때의 저는 주변으로부터 또래에 비해 성숙하다는 칭찬을 종종 듣곤 해요. 

반면, 굉장히 사적인 일상에서의 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에요. 이때 애착 관계는 사람의 정서적 성숙도를 판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죠. 저는 애착 관계가 생기면 이 사람이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게 내가 잘해야 된다는 일종의 강박 상태에 빠지게 돼요. 저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좋게 보일 만한 모습들을 연기하죠. 솔직한 제 자신을 표현할 수 없고 상대방에게 필사적으로 제 자신을 맞추곤 해요. 하물며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에서도 제 의견을 내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어요. 

이렇듯 상대방에게 제 자신을 맞추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절대 될 수 없죠. 저의 이러한 성향은 상대방을 진정으로 위해서가 아닌, 제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의견 충돌이 생기면, 상대방이 나를 이기적으로 보게 될까 봐, 그래서 나를 더 이상 좋아해 주지  않을까 봐, 하는 두려움을 견딜 수 없어요. 결국 제 마음 편하자고 하는 행동에 불과하기에 스스로의 미성숙한 부분이라고 평가해요.  

저는 친구나 애인 관계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하는 성향이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애인과 2년 넘게 안정적인 관계를 지속하면서 서서히 이러한 결핍을 채워 나가려 노력하고 있어요. 카톡에 답장이 안 오면 잠에 들지 못했던 2년 전에 비하면, 확실히 최근에는 애착 관계에 대한 감정 소모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래도 아직 완전히 성숙한 단계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언젠가 애착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제 자신이 되는 것을 목표하고 있어요. 

발 내딛는 순간마다 저는 조금씩 성장해 나가고 있어요.

저는 스스로가 성인이지만 어른은 되지 못했다고 느껴요. 어른이라는 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오랜 시간 여러 종류의 경험과 노력을 거쳐야만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든요. 대학에서의 활동들, 애인과의 감정 교류, 순간마다 저는 조금씩 성장해 왔죠. 때문에 앞으로도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활용해 제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도전하고 많은 경험을 얻을 생각이에요. 대학생이 제공하는 기회에서는 수익을 내지 않아도, 마땅한 성과가 없어도 당장 생존의 위기에 놓이지는 않으니까요. 안전이 보장되는 곳에서 홀로 생존할 능력을 기른 뒤에, 완전한 제 자신이 되어 독립하고 싶어요. 

자의적인 선택을 내리고그에 따른 책임을   아는 현명함이 필요해요. (20학번, 8학기 재학 중) 

저는 살아가면서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성숙도 선택과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되네요. 성숙은 자아 형성과도 비슷하며,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나에게 맞는 판단을 하는 것이요. 본인만의 판단 없이 남들이 하는 대로 선택하는 것은 미성숙함에 가깝다고 느껴요.  

현명한 선택이란 선택 후의 자세에서 온다는 말을 믿어요. 결국 정답은 없고 스스로에게 가장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이 곧 현명함이 고성숙 함이라는 거죠. 좋아했던 드라마 <스타트업>의 서달미 같은 사람을 동경해요. 소신과 강단 있는 선택으로 CEO로서 본인만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모습들이 멋져 보였거든요. 저 역시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안정적인 태도와 더 분명한 선택의 기준을 가지고 싶어요. 앞으로, 특히 사회인으로 지내다 보면 저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일들이 많이 생길지도 모르죠. 이럴 때 심한 감정 기복을 겪지 않도록 단단한 사람이고 싶어요.    

살아갈 자리를 직접 선택한다는 것의 의미를 실감해요

‘인생은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이다’라는 문장을 자주 생각해요. 대학 생활 중 가장 큰 선택은 휴학을 결정할 때였어요. ‘대 3병’이었을까요, 3학년 여름방학에 문득 눈물이 났는데 며칠 동안 멈추지 않았어요. 당시에 대회며 학생회며 프로젝트며, 여러 가지를 병행하고 있었는데 계속 바쁘게 생활해 와서 지쳤던 것 같아요. 다음 학기를 어떻게 다녀야 하는지 도저히 그려지지 않고 막막하기만 해서 일단 휴학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어요. 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죠. 

휴학을 해야 하나? 계속 다녀야 하나? 나는 왜 눈물이 나고 힘들어하지? 이런 고민과 생각들을 끊임없이 하다가 블로그에 긴 글을 한번 써 내려가면서 생각 정리를 했어요. 처음 하는 중대한 선택을 잘 해내고 싶어서 선택에 관한 글들을 모아 정리해 보기도 했고요. 결정을 해야 할 때면 지금도 그 내용들을 좌우명처럼 떠올리고 있어요. 그리고 확신은 없는 상태였지만 휴학을 해보기로 마음을 정했어요. 대학 입학 후 겪은 코로나, 여러 활동들. 물 흐르듯 흘러가던 시간들 속에 휩쓸리던 도중 한번 멈춰 가기를 처음으로 선택한 거였어요.

늘 기숙사에 살아오다가 휴학을 하면서 처음 자취를 시작했죠. 기숙사에 살던 때에는 통금 시간도 있었고 룸메이트도 있어서 제 시간과 생활이 온전히 자유롭지는 않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자취를 시작하니 나의 공간이 생기고, 집을 꾸미고 관리하는 것부터 저의생활까지 모두 제 선택으로 정해지더라고요. 실제로 다른 어떤 타인의 영향도 받지 않으니 저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법도 터득했죠. 이때 저만의 판단 능력을 기르며 제 스스로의 성숙도가 가장 급증했어요.  

이후의 인생에서 내가 어디서 살고, 일하고, 누구와 함께할지 등 모두 내 선택의 영역으로 두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특히 어디서 살지를 스스로 선택하고 싶어서 대학생 때는 여러 곳에 살아보는 경험을 하려고 노력하게 되었어요. 환경이 달라져도 내가 잘 적응하고 살 수 있는지, 어떤 환경이 잘 맞는지 등을 알아보기 위해서요. 프로젝트를 하면서 소멸위기 지역인 작은 도시에 살아보기도 했고, 교환학생을 간 것도 이런 이유가 컸어요. 저는 그곳에 제가 할 일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다면 잘 적응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걸 만드는 노력을 했고요. 예를 들어서 교환학생으로 프랑스 파리에 있을 때는 현지 친구들을 사귀려고 노력했고 시험공부나 통역 알바 등할 일을 만들려고 했어요. 나중에 지방이나 외국에 살 기회가 생기면 이때의 경험이 큰 자양분이 될 것 같아요. 

헤맨 만큼 전부  땅이  테니까요.

대학 진학 전의 저는 거의 미성숙의 상태였다고 생각해요. 친구랑 장난처럼 ‘우리는 이제 5살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스무 살부터 다시 태어난 것처럼 계산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전에는 우리가 직접 선택하기보단 흘러가듯 진행되는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크게 고민하는 법이 잘 없잖아요.  

하지만 대학 생활에서는 기회의 폭이 매우 넓어지고, 새로움을 접하는 데 열린 환경을 접하게 되죠. 우리에게 이런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서투른 면이 많았죠.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텐데 그걸 알고 있음에도 늘 흔들렸어요. 저는 선택을 할 때 과거도, 미래도 고려해야 하고 최대한 많은 요소들을 두고 생각해 보기 때문에 무척 신중한 편이에요.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후에도 다시 돌아보고 번복하고 길게 고민하곤 해요. 그런 제 스스로를 미성숙하다고 느끼고, 제가 더 성숙해지고 나면 그런 고민의 시간이 짧아지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는 고정적인 자리가 없는 대학생 때 최대한 많이 헤매고 경험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헤맨 만큼 내 땅이다’라고들 하잖아요. 저에게 주어진 대학생이라는 기회를 잡아, 복수전공도 하고 여러 전공 학우들과 어울리면서 완전히 다른 분야에 흥미를 느껴 공부해보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직접 한 선택들이 쌓이면서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작년에는 휴학을 하며 인턴을 했어요. 교환 학생 후 막학기를 남겨두는 등 학기를 맞추기 위함이었지만 대학생 신분으로 인턴 등 경험을 하게 되면 다시 학기를 다니면서 진로를 더 고민해 볼 수 있는 점이 부담감을 덜어주는 듯해요. 때문에 저는 막학기 이후에 취업 준비를 하게 된다면 졸업 유예도 염두하고 있어요. 졸업 예정자와 졸업자의 차이가 주는 영향을 분명히 알지는 못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압박감에는 분명 차이가 있으리라 예상해요.  

지금도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게 있어요. 결정했다가 번복하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미성숙한 저의 모습이라고 보여요. 생각한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그동안은 여러 가지 다른 일들에 밀려왔죠. 다음 학기에 시간을 두고 배울 기회를 만들어 두었는데 취업 준비에 집중해야 할지, 수업을 들으면서 새로운 분야를 더 학습할지 아직 고민 중에 있어요. 이번에야말로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에게 어떤 게 더중요할지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겠죠. 그래서 막학기, 대학 생활의 마무리를 앞두니 선택 하나하나에 더 많이 신중해지네요. 지금 의미성숙한 제가 내리는 선택을 이후에 조금 더 성숙한 제가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요. 




섬세함, 솔직함, 완전함, 현명함. 네 학우들이 제시한 성숙의 기준은 서로 상이했으며, 지향하는 목표나 속도 또한 달랐다. 성숙을 원치 않는 사람도, 닿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잠시 쉬어가길 택한 이도, 쉼 없이 달려가길 택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실패했다고, 혹은 도태되었다 평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과정 위에 있는 스스로를 긍정했다. 완주의 기준도, 결승선 위치도 다른 이들을 한 곳에 선형적으로 줄 세워 경쟁을 붙이거나 순위를 매기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결국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경주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이라는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가 달리는 방향대로 대학은 모습을 바꾸어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 왔다. 누군가에겐 실패의 두려움이 없는 안전지대가, 또 쉬어갈 쉼터가 되어주었다. 또 누군가에겐 위험 없이 넘어질 수 있도록 완충재의 역할을, 더 높은 곳을 도전해 볼 수 있도록 뜀틀의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우리 모두 각자의 목표를 향해각자의 속도로 달려보자. 헤매다 돌아가면 어떻고, 도중에 지쳐 잠시 쉬어가면 또 어떤가. 대학은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그에 맞는 경주장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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