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때로 예측 불가능한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그중에서도 인간관계는 가장 복잡하고 미묘한 오케스트라와 같습니다. 때로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주하지만, 때로는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기도 하죠. 제게는 오랫동안 이해하기 어려웠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늘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떤 고민을 털어놓으려 하면, 마치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듯한 태도로 저를 대했습니다.
"그런 얘길 왜 나한테 해?" "내가 어떻게 알아?"
그 친구의 말은 늘 칼날 같았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딱 잘라버리거나, 심지어는 제가 민망할 정도로 차가운 반응을 보이곤 했습니다. 제 마음은 늘 상처받았고, 때로는 '나는 이 친구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서글픔마저 들었습니다. '어쩌면 저 친구는 원래 냉정하고 무심한 사람일지도 몰라.' 저는 그렇게 스스로 결론 내리고, 친구에게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점차 포기했습니다. 친구의 귀는 제게 닿지 않는 먹먹한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여전히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었습니다. 비록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일상의 소소한 만남은 이어졌죠.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놀라운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무심코 던진 일상의 이야기, 가벼운 푸념에도 친구는 이전과 달리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제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가끔은 짧지만 진심이 담긴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변화가 너무나 신기하고 어색해서, 결국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너 진짜 변했다. 예전엔 내 얘기 듣기도 싫어하더니."
제 말에 친구는 잠시 먼 산을 응시하더니, 나지막이, 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이전의 칼날 같던 어조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마치 오랜 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리는 듯한, 조심스럽고도 진솔한 울림이었습니다.
"예전엔 내가 너무 힘들었어. 내 마음이 너무 지쳐서… 다른 사람 얘기가 안 들렸어. 근데 요즘은 좀 괜찮아졌나 봐. 그러니 이제야 네 얘기가 들리더라."
친구의 말이 제 가슴을 콕 찔렀습니다. 마치 얼어붙었던 심장에 따뜻한 물방울이 떨어진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아…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들을 수 있구나.' 그 순간, 저는 그동안 그녀를 오해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친구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버거움'에 짓눌려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나쁨' 때문이 아니라, '버거움' 때문에 귀를 닫을 수 있다는 것을요. 마음이 너무 지치고, 내면의 공간이 너무 협소해져서 더 이상 타인의 목소리를 담아낼 여백이 없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귀를 닫아버린다는 것을요. 마치 물이 가득 찬 컵에는 더 이상 다른 물을 담을 수 없듯이, 마음이 버거움으로 가득 차면 타인의 이야기는 그저 흘러넘칠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친구는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헤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김혜남 작가님의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라는 책이 말하듯, 우리는 때로 자기 자신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내면을 가진 존재입니다.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돌볼 여력이 없을 때,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사치에 가깝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의 '버거움'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스스로를 돌보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마음의 여백을 되찾았던 것이겠죠. 그리고 그 여백이 생겨나자, 비로소 제 목소리가 그녀에게 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의 깨달음은 제 삶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습니다. 그 뒤로 저는 누군가가 화를 낼 때도,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 지금 저 사람 마음에도 여유가 없구나.'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작가님의 『당신이 옳다』에서 말하는 '공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상대방의 말에 동의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버거움'이 있는지를 헤아리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 그 사람의 '버거움'을 알아주고 '당신은 지금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라고 말없이 인정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공감의 시작이라는 것을요.
이러한 이해의 눈이 생기자, 저는 더 이상 사람들의 행동에 쉽게 화를 내거나 실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 뒤에 숨겨진 '마음의 여백'을 헤아리려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조용히, 하지만 깊이. 그렇게 저는 사람을 이해하는 새로운 눈을 하나 더 얻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끝없는 책임과 의무,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때로 마음의 여백을 잃어버리고, 자신은 물론 타인의 목소리에도 귀를 닫게 됩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마음의 여백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 여백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숨을 고르고, 자신을 돌아보며, 그리고 타인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세상의 소리가 비로소 들리기 시작합니다. 타인의 고통이, 그리고 그들의 기쁨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쩌면 이 '여백의 미학' 속에 숨어있는지도 모릅니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도 작은 여백이 생겨나, 들리지 않던 소중한 목소리들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그 목소리들이 모여 당신의 삶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하모니로 채워주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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