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그루터기에서 피어난 생명의 메시지
며칠 전, 종일 퍼붓던 장대비가 잠시 멈추고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축축하지만 상쾌한 공기, 빗물에 씻겨 더욱 반짝이는 나뭇잎들 사이로 저는 노란 우산을 들고 산책길에 나섰습니다.
어느새 발걸음이 가벼워졌고, 손에 쥔 노란 우산이 괜히 더 발랄하게 느껴져 피식 웃음이 났죠.
그렇게 걷던 중, 문득 한 풍경 앞에 멈춰 섰습니다.
아주 크고 묵직한 나무 한 그루, 아니, 정확히는 ‘그루터기’였습니다.
몸통은 어딘가로 잘려 나간 듯 비어 있었고, 그 자리엔 연륜이 고스란히 담긴 굵고 선명한 나이테들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듯한 우람한 밑동은 여전히 꿋꿋했지만, 어쩐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조금은 안타까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루터기 중심부는 누군가가 발로 찼는지 깨져 있었고, 특히 왼쪽 면에서 자라나던 가지들은 얼마 전에 싹둑 잘려나간 듯했습니다.
그 밑동 주변엔 파란 은행잎 몇 장이 너부러져 있었고, 잘린 자국은 아직 선명했습니다.
생명을 틔우려 애쓴 흔적들.
그런데 누군가는 그걸 끊어내고, 또 짓밟았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둥 가장자리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새싹 하나가 조용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마치 “나는 아직 살아 있어요” 하고 말하듯.
죽은 듯 보이던 상처 위로 다시 솟아오르려는 그 초록빛은, 그 자체로 강인한 생명의 의지였습니다.
저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삶의 그루터기, 상실과 재생의 드라마
그 장면 앞에 선 저는, 문득 인생의 여러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예고 없이 쏟아지는 장대비 같은 시간들.
예상치 못한 이별이나 실패, 그리고 마음 깊이 남은 상처들.
때로는 삶의 한 조각이 송두리째 잘려나간 듯한 상실감을 겪기도 하죠.
남겨진 건, 고스란히 새겨진 시간의 흔적들.
잊고 싶은 기억조차 지우지 못하고, 가만히 껴안고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무 그루터기는 조용히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상처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자리일 수 있어요.”
겉으로는 죽은 듯 보였지만, 뿌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땅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생명의 에너지를 끌어올리고 있었던 거죠.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삶이 휘청이는 순간에도, 우리 안에는 꿋꿋한 ‘뿌리’가 존재합니다.
그 뿌리는 회복탄력성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연결이기도 하며,
인생에 대한 애틋한 의지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뿌리 덕분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인체의 신비, 재생과 회복의 기적
그날 본 그루터기에서 잘려나간 새싹은,
우리 몸이 가진 회복력과도 닮아 있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스스로를 치유하고, 손상된 세포를 계속해서 재생해냅니다.
* 피부는 약 28일마다,
* 적혈구는 120일마다 새로 태어납니다.
마치 나무가 잘려도 뿌리에서 다시 싹을 틔우듯,
우리 몸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회복 탄력성(Resilience)
심리학에서는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오거나,
오히려 더 성장하는 힘을 회복 탄력성이라 부릅니다.
상처 위에 새싹을 틔우는 나무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때론 이 힘이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아픔을 의미 있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 안의 생명력을 더 키워준다고,
많은 연구들이 말합니다.
면역력, 보이지 않는 생명의 수호자
나무가 썩지 않고 새싹을 틔울 수 있었던 건,
보이지 않는 생명력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우리 몸 역시 강력한 면역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균형 잡힌 식사,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수면, 그리고 스트레스 관리…
작지만 중요한 습관들이
우리의 면역력,
그리고 생명력 전체를 지켜줍니다.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지혜
장대비 그친 산책길에서 만난 그루터기는
말없이 많은 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잘려나간 것처럼 느껴졌던 내 삶의 조각들이,
어쩌면 새싹을 틔우기 위한 밑거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매일 다르게 살아갑니다.
같은 듯 다른 하루, 같은 듯 다른 우리.
상처는 여전히 아프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자라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 상처 위에서 조용히 새싹이 트고—
햇살을 향해 다시 자라나게 되겠지요.
시간의 흐름과 상처를 받아들이는 삶,
그 안에서 피어나는 생명력.
그것이, 우리가 가진 진짜 희망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떤 역경 속에서, 어떤 희망의 새싹을 틔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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