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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선 Aug 24. 2021

대충 그린 자화상

<자화상의 비밀>(로라 커밍) 을 읽고


 1학기 때 들었던 기초조형워크샵 수업에서 교수님이 과제로 자화상을 그려오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이 그려온 과제를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짧은 평가를 해 주셨다. 사실 다른 학생들의 자화상에 대한 평가는 기억나지 않고 내 평가만 기억이 난다. (내 평가가 어떨지 궁금해서 한참 기다린 것도.) 근데 그렇게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내 자화상에 대한 평가는 생각보다 밋밋했다. 그냥 표현력이 재미있네요. 색감도 재미있고. 이 정도. 나는 재미있다는 저 평가가 칭찬 같으면서도 내심 너무 가볍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이유는 이후 교수님과 가졌던 개인 면담에서 알 수 있었다. 개인 면담에선 공개 평가보다 조금 더 솔직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교수님은 내 자화상을 보고 딱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것도 안 느껴지네요. 대충 그렸다는 뜻이죠?" 


  아니 열심히 해 간 과제에 대충 그렸다고?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그렸는데!라는 생각은 웃기게도 들지 않았다. 반전이라고 하면 반전이라고 해야 하나. 그 대신 교수님의 저 평가가 바로 납득되고 공감됐다. 아, 그러게요. 아무것도 안 느껴지네요. 제가 대충 그렸나 봅니다. 


 반면 나와 친한 동기가 받은 평가는 내 평가와는 그 결이 달랐다. 교수님은 그 친구의 자화상을 보자마자 한참을 쳐다봤다면서 공개 평가 때도 "허어..." 하면서 몇 초간을 보고만 계시는 것 같았다. 나도 그 그림을 보고 범상치 않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친구에게 미술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더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래서 이 친구에게 질투심이 들었다거나,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식의 자기 비하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언가가 느껴지는 자화상' 이란 뭘까? 내 자화상과 그 친구의 자화상은 뭐가 달랐을까? 자화상에서 느껴져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애초에 그런 게 있기라도 할까? 나는 어떻게 교수님의 저 평가를 단박에 납득할 수 있었을까?(내가 그려놓고도 이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 모순적이기는 하다.)


 이런 생각들을 아빠한테 이야기하니(사실 아빠한테는 쪽팔려서 저만큼 자세한 이야기는 안 했다...ㅎㅎ) 아빠는 대답 대신 나보고 자화상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바로 <자화상의 비밀>이다.


  사실 아직 감상 경험이 부족한 나에게는 읽기 어려운 책이었다. 주체적인 감상보단 책에서 서술하는 대로 감상하게 되는 면도 있었다. 또 아무래도 내가 느끼기에 번역이 매끄럽지 못 한 부분도 있어서 약간 수능 영어 지문 해석본 읽는 느낌도 났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내가 더 공부하고, 더 많은 그림을 감상한 후 다시 읽으면 해결될 문제일 듯 하니 오늘은 처음 읽었을 때의 감상을 솔직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 느낀 것은 내가 자화상에 대해 갖고 있는 견고한 편견이었다. 화가들은 정말 다양한 이유로 자화상을 그린다. 그것들을 비슷한 이유끼리 묶어 범주화시킬 수는 있어도 그 이유가 같은 자화상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로는 한 가지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 한 가지 이유도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과 성찰이라던가 자아의 탐색 같은 거창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들은 자신에 대한 고뇌 때문에 무지 고통스러워야 한다.- 물론 많은 자화상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과 성찰과 자아 탐색에 기반하여 그려졌다. 그리고 꼭 저렇게 그려진 자화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것만을 자화상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생각이었다. 더불어서 저렇게 그려진 자화상만이 좋은 자화상이라고 여기는 것도.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삶과 자신의 모습을 통찰하였지만 벨라스케스는 그림과 관객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젠틸레스키는 남들이 바라봐주길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마치 자기 스스로는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양- 그렸고 파르미자니노는 거울 속 모습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을 은은한 소년의 미소로 나타내었다. 사전트는 엉겁결에 부탁을 받아 자화상을 그렸는데 책에서는 그 자화상을 보고 '드러내는 바가 놀랄 정도로 없다'라고 표현했다 뭉크가 그린 수많은 자화상의 경우, 화가 자신은 비참했을지 몰라도 그의 개인사에 공감하길 꺼려하는 한 관객이 본다면 그저 피해자 코스프레의 한 종류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다양하고 재미있는 자화상들을 나는 모든 자화상은 엄숙하고 고뇌를 담고 있을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엉터리로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느낀 것은 왜 내 자화상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가에 대해서이다. 사실 이건 어쩌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으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굳이 그것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유는 당연하겠지만 말 그대로 내가 별생각 없이 그려서이다. 나는 그냥 과제니까, 교수님께 보여주기 위해서 마치 입시할 때 인쇄된 그림을 카피하듯이 내 얼굴을 그렸던 것이다. 거기에 약간의 손장난을 더했을 뿐 나는 '나'를 그린다는 인식도 없었고 '나'에 대해서 어느 종류의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아마 '나'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 테다. 아주 예민하고 기민한 친구니까 안 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생각의 결과는 아직 미숙할지라도 그대로 화폭에 나타나게 되나 보다.


 여기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이렇게 그린 나의 자화상과 사전트의 자화상을 동일 선상에 두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드러내는 바가 놀라울 정도로 없는 것'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은 같지만 그 속은 완전히 다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나의 자화상은 비어있지만, 드러내는 바가 없는 사전트의 자화상에서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그의 무관심한 무표정을 읽을 수 있다. 만약 그가 자화상을 주문한 사람을 약 올리기 위해서, 또는 그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리라고 해서 그런 자화상을 그렸다고 상상한다면(책에는 그의 자화상이 자화상을 그릴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던 화가가 그린 자화상의 예로 나온다.) 그의 자화상은 실패한 자화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표정도 관람자가 읽어낸 순간 표정이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거의 말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굳은 결심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말을 통해 사전트의 자화상을 묘사한다. 사전트가 정말 자화상과 당시 유행하던 아첨꾼들의 초상화에 무관심하려 했다면, 내가 그렸던 자화상처럼 그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오만한 생각을 잠깐 해 본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도 내 자화상을 한 번 더 그려보았다. 사실 새로 그린 이 자화상에서 무언가가 느껴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교수님께 보여줄 그림이 아니니 이전 자화상보다 조금 더 자유롭게 그리긴 했다. 또 이번에는 그리면서 적어도 조금이나마 '나'를 그린 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그려보았다. 


 나는 거울을 보든 셀카를 찍든 남이 찍은 나를 보든 어떤 형태로든 나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전에 자화상을 그릴 땐 일부러 더 입시 그림 그리듯이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그린 자화상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그린 자화상은 이전 자화상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를 감추려고 했다. 색도 눈도 고갯짓도.

자화상 2020 (교수님께 대충 그렸단 소리를 들은 그 자화상)


자화상 2021 (여전히 대충 그린 게 아닌가 싶은 자화상)

 자화상을 그린 화가들은 꽤 많은 자화상들을 남겼는데 왜 그랬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내가 그려보니까 한 번으로 만족되는 자화상은 없겠구나 싶다. 나도 아마 앞으로 종종 더 그려보지 않을까. 그 이유는 역시 다양할 것이다. 이번처럼 책을 읽고 난 전과 후를 비교하고 싶어서 그릴 수도 있을 테고, 인생에 한 번쯤은 나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하게 될 테니 그때 가서 다시 그릴 수도 있을 테지. 아님 누군가에게 또 자화상을 그리라는 과제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자화상이 되었든 간에 이전과 똑같은 자화상은 그리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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