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갑질 피해자입니다.

by 케빈

사무실에서 혼자만의 전쟁을 조용히 치러나가던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그날은 큰 아이가 아파 학교를 조퇴시키고 두 시간 먼저 퇴근해서 아이 병원 진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 후 지하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둘째 아이와 동갑인 친구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른 채 인사를 하는데 아이의 얼굴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겁니다. 너무 놀라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싸웠어요."

"누구랑 싸웠는데 얼굴이 그래?"

"형아가 그랬어요."


둘째 친구의 형아는 저의 큰 아이와 동갑이라 또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퇴근일에 이웃과 인사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큰애와 작은애는 두 살 차이가 나는데 여태 서로의 얼굴에 상처를 낼만큼 크게 싸운 적이 없었습니다. 남자아이 둘이라 사소한 다툼은 매일 있지만 주로 형이 참는 역할이었습니다.


저는 유달리 예민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나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행동이나 말들이 혹여나 저와 관련된 것들이면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습니다. 미래의 시간을 빌려와 현재를 온전히 고통 속에서 보냅니다.


저의 이런 모습들을 큰 아이가 닮아서 걱정입니다. 큰 아이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타인의 걱정을 먼저 합니다. 공감능력이 뛰어나 보이기도 합니다. 아이는 아이답게 천진하고 착하기만 한데 저는 그 타고난 기질이 너무 걱정이 됩니다.


이 녀석이 자라면서 아빠처럼 많은 상처를 받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요즘 아이들에게 힘없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되도록이면 집에서 웃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직장에서 있었던 안 좋았던 일들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칠 때면 표정이 일그러지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아빠의 표정을 읽고 "아빠 무슨 걱정 있어?" 하고 물어봅니다.


그렇게 나쁜 생각이 스치지 않도록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습니다. 약에 의지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약을 먹으면 아이들에게 나쁜 표정을 들키진 않게 됩니다. 그리고 최대한 오늘에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저의 아이는 갑질이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나쁜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