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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의 5가지 원인

by 장산하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2023년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를 대상으로 1년 동안 조사에 따르면 3명 중 1명이 번 아웃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번 아웃 되는 큰 이유는 결국 스트레스의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안감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 이상이 왔는데도 멈춤 없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달리다가 번 아웃이 오는 겁니다.


특별히 직업군에서 통계를 보면 자기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빈번하게 무기력에 빠지는 일이 많이 나왔습니다. 깊은 무기력에 빠지는 이유는 이원론적이지 않고 다양한 이유에서 찾아올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 무기력이 왔을 때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그래요. 죄 때문에 그래요.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키세요.” 물론 무기력함과 우울증은 영적인 문제로부터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이원론적으로 우울증을 죄 때문이라고만 말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깊은 우울증이 찾아왔을 때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며 기다려줘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우울증이 올까요? 크게 5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어떤 사건이나 인간관계의 아픔에서 우울증이 올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우울증이 오면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깊은 외로움으로 들어가고 사람들과의 갈등을 피하게 됩니다.

어느 날 둘째가 갓난아기일 때 차에서 큰 소리로 ‘으앙~’하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운전을 하다가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마음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공황 장애가 온 겁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심리학 교수님이 있어서 전화로 상담했습니다. 교수님은 혹시 제가 공황 장애가 시작되는 시점에 언제였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에스라성경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파트로 청년부 부교역자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은 “목사님 혹시 그 당시에 겪었던 어려움이나 어떤 사건이 있으셨나요?”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순간 한 사건이 생각이 났습니다. 교회의 어려움과 큰 상처로 인해 청년부 회장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제게는 이 사건이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목회를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았고, 영혼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함께할 생각이었지만 힘이 완전히 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목회적 스트레스와 함께 둘째가 울 때 많이 힘들었던 겁니다. 교수님께서는 제게 그 청년과 한번 만날 수 있다면 만나거나, 어려우면 연락이라도 해보기를 권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을 만나기는 어려웠지만 연락하면서 교회와 청년 안에 어려웠던 것들을 듣고 또 제가 대신해서 용서를 구하며 연락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제게 상당 부분 공황 장애에서 벗어남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완벽하게 좋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호전되고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좋아진 경험이 있습니다.


둘째는 영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 점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스마트폰에 ‘중독’되면서 영적인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교제하는 집중력이 약해졌습니다.

또한 반복된 죄, 습관적인 죄에 빠질 때 깊은 영적인 무기력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저는 『죄에 좌절한 이 시대 청년들에게』 책을 썼습니다. 청년 시절 은밀한 죄에 반복적으로 빠지면서 영적 무기력을 경험하였고, ‘어떻게 습관적인 죄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라는 단 한 가지 질문을 가지고 믿음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정답을 찾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믿음이 제 삶에 실제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승리를 맛보고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모두 알고 있듯이 죄는 한번 이겼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날 때까지 평생 싸워야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죄에 빠져있을 때는 깊은 영적인 무기력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릴 때 말할 수 없는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셋째는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연약함 때문입니다.

정서적인 상태가 계속 악화될 때 무기력하고, 의욕을 상실하며 남을 향해 쉽게 분노하게 됩니다. 특히 가족을 향한 배려심도 약화됩니다.

우울증은 크리스천들과 목회자, 선교사들에게 더 많이 찾아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이상의 높이가 있다면 우리의 현실은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정말 복음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는데 도저히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우울감과 좌절에 빠지곤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선지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별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눅 9:31). ‘별세’의 의미는 ‘엑소도스’(출애굽)인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엑소도스’, 출애굽 하는 사건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바알과 아세라의 거짓 선지자 850명과의 영적 대결에서 ‘엑소도스’, 승리하고 건저 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성도들을 ‘엑소도스’,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한마디로 율법의 대표자는 모세이고, 선지자의 대표자는 엘리야인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도 깊은 우울증이 옵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왕상 19:4)


우리는 로뎀 나무를 잎이 무성한 큰 나무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 선교사님께서 로뎀 나무 알려주셨는데 1m가 조금 넘는 초라한 나무였습니다. 로뎀 나무의 뜻은 ‘싸리나무’입니다. 엘리야의 초라하고 좌절 가운데 있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완전히 좌절하여서 “하나님 저를 죽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놀랍게도 바로 앞장인 열왕기상 19장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들과의 영적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자 7번 기도하고 비가 내리는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는 왜 이렇게 영적 무기력에 빠지게 됐습니까? 엘리야의 정서적인 상태가 약화된 겁니다.


엘리야는 두려워 떨며 목숨을 구하여 급히 도망쳤다. 그는 유다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곳에 시종을 남겨두고 (왕상 19:4 공동번역)


아합 왕은 제단 위에 불이 떨어지고,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이 죽고, 가뭄에서 엘리야의 기도로 비가 오는 기적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아합 왕은 변화돼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합 왕은 그대로 실세인 이세벨에게 가서 보고합니다.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사신을 보냅니다. 엘리야는 회개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사람에게 좌절했고, 심리적으로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게 된 겁니다.


넷째로는 신체적인 약함이나 질병으로 인해서 올 수 있습니다.

신체의 약화와 피로감으로 몸의 바이오리듬이 점점 무너지면서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제게 심한 우울증이 왔을 때 정신과 전문의 유은정 교수님께 찾아갔습니다. 교수님은 제게 보통 사람들보다 심박수가 많이 높다고 말씀하면서 스트레스 지수가 몸이 못 버틸 정도가 되면서 우울증이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치 제 몸이 유리잔이라면 그 잔이 많이 작아져서 조금만 스트레스가 넘쳐도 그 물 잔이 쉽게 넘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영적인 것에는 집중하면서 자신의 신체에는 조심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육체가 건강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지옥을 향해 달려간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가 건강하지 않다면 영적인 사역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오래 앉아있거나 건강을 관리하지 못할 때 무기력 빠지곤 합니다. 오래 건강하게 목회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운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주권에서 오는 우울증입니다.

욥은 고난이 오면서 깊은 우울감에 빠집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 3:1)


욥은 자신의 태어난 생일을 저주합니다. 그가 처한 고통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지경이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의 삶에 고난과 깊은 슬픔이 찾아왔을 때 죄 때문이라고 고발합니다. 욥의 세 친구에게는 보상교리가 있었습니다. 보상교리란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명기 28장의 이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찾아온 욥의 삶은 죄 때문이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욥기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욥이 아니라, 욥의 세 친구를 책망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상교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이십니다. 욥기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삶의 깊은 고난과 우울, 좌절이 온 이유는 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사역에 놀라운 축복을 준비하실 때마다 먼저 우울증이 다가왔다. 우울증은 나에게 있어 거친 옷을 입은 예언자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우울증이 왔을 때 정죄와 판단하는 마음과 말이 아니라, 따뜻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그를 위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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