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만난 불꽃남자(2)
아마도 지구는 자전속도를 조절할 줄 아는 명석한 존재일 것이다. 이 말을 축약하자면 천재. 왜냐하면 중학교 때 알차게 팔아버려 공석인 양심에게 준 일주일이라는 쉼의 기간은 애석하게도 순식간에 가버렸으니까. 조금 더 천천히, 더 늦게 갈수도 있었음에도 말이다. 이게 나에게 닥친 현실이 아니라고, 꿈속에서의 허상이라고 누군가가 귀에 대고서 현실이 아니라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제발.
짝 지어져 있는 자리가 아니라 커닝을 방지하는 시험 대형은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3일이라는 구성의 시험날인 사실만 상기시켰다. 교실 안 공기는 점수를 위한 긴장감과 일찌감치 점수를 포기한 느슨함이 오묘하게 섞인 상태의 기류를 만들었다. 정말 극과 극이었다. 이제는 닥쳐온 현실을 부정조차 못하는 실제상황이 되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어젯밤, 예습과 복습은 평소 일과 속에선 무시했던 나였지만 시험에 대한 자그마한 걱정으로 그동안 아는 척도 안한 공부를 벼락치기라는 능력으로 겨우 시험범위를 따라 잡았다. 하지만 등교한 시점부터 악에 받쳐 공부한 내용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중이었다. 정말 큰일 난거다. 아직 등교시간이라서 빈자리들이 많고 이후 자습시간도 있지만, 시험지 앞에서 하나라도 더 적어내기 위하여 한국사 교과서와 노트를 꺼내 눈으로 넣어 말로 뱉고, 머리에 찍어냈다.
“포기하면 편해! 나와 함께 가자.”
“혼자 가, 난 외우기라도 할 거야.”
“혼자서 가기엔 외롭잖아! 이영준 너도 그렇지?"
비어있는 20번 앞자리에 걸터앉은 수빈은 태어나기도 전에 살던 선조의 지혜를 외우는 머리를 방해시킬 작정인지 실컷 조잘대고 있다. 그러면서 21번 다음인 22번, 내 뒷자리에 앉은 이영준에게는 앞 맥락이 이상한 4차원 저기 어딘가에 있을 공감을 강요했다.
“나랑 너는 다르지. 넌 아메바잖아?”
“너나 나나 도긴개긴이야!”
도토리 키 재기로 보였지만 신경 끄기로 했다. 왜냐하면 구석기시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간 먼 과거 선조들의 업적을 사건시간대 별로 암기하기도 벅찼다.
“아니지, 두뇌는 내가 한 수 위지.”
“뭐래! OMR카드 컴싸로 대충 줄 세워서 찍고 잘 놈이!”
아메바로 출발하여 번호 통일까지 삽시간에 이루며 서로 간에 트집을 잡았다. 항상 수빈이 먼저 사건의 원흉을 꺼내서 이영준의 약간의 장난으로 골리는 말들로 이어졌는데, 이게 이번 한 달하고 반 동안 익숙해져 별일 아니라며 넘기는 나도 새삼 놀라웠다. 그만두지 않는 것 같은 실랑이에 끼어서는 막바지 공부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잠깐 손이라도 닦으며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섰다. 트집 잡기 바쁜 둘은 온 정신은 거기에 집중해서 내가 화장실에 가는 걸 알아채지도 못했다.
복도로 나오자 뛰고, 걷고, 단어장이나 프린트를 보는 등의 다양한 묘기들을 부리며 등교하는 학생들이 사이사이 있었다. 시험날 등교하는 애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걷는 난 모퉁이에서 누군가의 탄탄한 가슴에 얼굴을 정면으로 부딪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폭신할 터인데 너무 딱딱해서 벽을 잘못보고 부딪친 줄 알았다. 그로 인한 반동으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눈에 별이 보였다.
“아야야야... 아파...”
넘어져서 찌그러진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고개를 들 여유가 없었다. 아픔에 찡그려진 눈앞에 나를 일으켜 주려는 투박한 큰 손 하나가 나타났다. 손을 따라 팔을 타고 점차 위로 목은 곡선을 그리며 눈이 또 만난 위치까지 꺾어졌다.
손을 내민 탄탄한 가슴의 주인인 남자애와 타고 올라간 시선이 서로 만났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세게 비볐다. 저번에 만난 동일 인물임에 놀랍기도, 믿기지 않아서 ‘미안해’라는 사과의 말을 하려고 입에 꽉 담아놨는데도 다른 말이 먼저 불쑥 튀어나왔다.
“저, 정연호?”
훤히 드러낸 짧은 머리에는 그늘 밑에서 묶어 드러났던 얼굴이 보였다. 머리길이가 큰 차이를 줄만큼 그림이 달라졌다. 짧아진 머리로 남자다운 이목구비의 장점이 최상의 시너지 효과를 냈다. 그런 새로운 정연호의 행색에 놀라서 잠시 놓쳤던 내 정신을 빠르게 다잡고 나서야 묵묵히 내밀고 있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설 수 있었다.
“처음에 순간 누군지 몰라 봤어.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린다.”
혹시나 넘어지면서 교복치마에 묻었을 먼지를 몰래 팡팡 털어냈다.
“네가 한 말 때문에 자른 건 아니야.”
“으음, 그렇구나.”
툭 말을 던지고는 짧아진 머리가 본인도 어색한지 그가 머리를 매만졌다. 이 시점에 나도 참 나쁜 애인 게, 포인트를 집어서 놀림조를 조금 섞은 말을 이어갔다. 그 날에 남아있는 앙심이 저지른 일종의 지독한 장난을 말이다.
“그렇구나, 난 내 말 때문이냐고 물은 건 아니었는데?”
“아.”
머리 위에서 움직이던 손이 흠칫하더니 아차 싶은 입매가 달싹거렸다. 무뚝뚝한 정연호도 이런 면이 있구나 생각하다가 웃음이 크게 터졌다.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그에 대한 어색한 편견이 깨지면서 말이다. 손 씻으면서 하려던 시험 전 기분전환을 복도 한복판에서 해결해 버렸다. 화장실까지 갈 필요도 없이. 저절로 기분 좋아지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폭소하듯 웃음을 띈 나를 앞에 두고 민망해졌는지 교복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주먹 쥔 손을 얼굴 가까이 들어 드러난 입매를 가리고 거듭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의 멋쩍은 기침소리는 까먹은 조금 전 상황에 관한 사죄를 목까지 급하게 잡아끌고 왔다. 중간이 없는 표정변화는 마음속으로 소리치는 ‘아파’랑 같이 급격하게 오르막길을 걸었다. 하지만 사소한 아픔은 숨기고 늦은 감이 있는 사과의 말을 꺼냈다.
“방금 부딪친덴 괜찮아? 미안해.”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정연호는 입을 가렸던 주먹을 세워 내 정수리를 살짝 내리쳤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왔다.
"아야!"
"복수. 시험, 잘 봐라.”
정수리를 두 손바닥으로 포개어 덮자 그가 미소 지었다. 시험기간에 머리 더 나빠지게 쳐야만 했냐고 말해야하는데 처음으로 보고만 그의 엷은 미소에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끝에 나타난 주먹에서 빛에 반짝거리는 작은 물체가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는 동시에, 아까 전에 툭 쳤었던 내 정수리를 툭 쳤던 투박한 큰 손이 이번에는 쓸고 지나갔다.
반사신경은 떨어지는 그것을 재빨리 손을 모아 닫으면서 받아냈다. 하마터면 바닥에서 물체의 정체에게 꽤 발랄하게 인사하며 확인할 뻔했다. 그나마 순발력은 좋아서 다행이었다. 손을 조심스레 열어 확인하니 예쁜 체리그림에 포장된 알사탕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 교실로 들어가는 정연호의 등에 대고서 내 목소리가 그의 귀에 잡힐 수 있도록 소리쳤다.
"너도 시험 잘 봐! 사탕 고마워!”
단 한 개뿐인 알사탕은 나올 때와의 걸음걸이를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달라지게 했다. 양 끝을 잡자 몇 바퀴 돌면서 은색 속포장지 밖으로 자태를 드러낸 불그스름한 사탕은 혀가 자신을 감싸 안도록 쏙 들어갔다. 이리저리 혀에서 양 볼로 굴러다니는 사탕은 인공적인 체리맛의 상큼함과 설탕 특유의 단 맛으로 입 안 구석구석을 정복했다. 순순히 정복되어 가는 미각을 즐기며 조금만 열린 교실 문의 틈을 가로로 지나 들어갔다.
거기서 거기인 도토리들의 키재기 대결은 어느새 마무리가 됐는지. 이원준의 손에는 샤프,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자기 자리인 듯 21번 자리에 태연하게 앉아 핸드폰을 보는 수빈에게 비키라는 신호의 손짓으로 보냈다. 책상 위는 화장실 가려고 나갔을 때 두었던 위치들은 노트를 넘겨보는 노력 같은 미세한 변화는 없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애가 형형색색의 형광펜으로 필기한걸 마다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무언의 손짓에 군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비켜주는 수빈이에게 내가 21번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네가 웬일이야? 이걸...”
“너! 뭐 먹고 있지? 혼자만 먹지 말고 나도 줘!”
볼을 둥글게 구르며 돌아다니는 사탕에게 수빈이 네 살배기 아이처럼 말을 빼앗고 생떼를 썼다. 먹보 레이더의 촉은 무서웠다. 이를 중재시켜 줄 소현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아침자습시간 7분전인 아직까지도 등교 전이었기에 도움을 받기는 불가능 했다.
“나도 받은 거야.”
“누구야? 누군데!”
“음, 비밀.”
‘비밀’과 함께 입에 지퍼를 닫는 시늉을 했다.
“누구냐니까!”
나에게 수빈이 징징대듯 소리치며 지퍼로 잠군 비밀에게 고래고래 아우성쳤다.
“배수빈, 네 목소리 복도에서 다 들려. 까마귀랑 친구하고 왔어?”
마침 예비종이 울릴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춰 등교하는 소현이 왼손으로 한국사 프린트 2장을 겹쳐 들고는 아침 댓바람부터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뒷문에 서서 저런 반응이 나온 건 직전에 일어난 상황을 알 리가 없는 소현에겐 당연했다.
“까악까악!”
“난 새대가리랑은 친구 안 해.”
“까마귀 똑똑해!”
까마귀 울음소리로 응답한 수빈에게 소현은 교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매몰차게 말했다. 말끝에 예비종이 따라 울리는데 늦게 오셔도 될 그분도 교실에 퍼지는 음률에 붙어오셨다.
“오늘이 시험 첫날인데 왜 이리 말소리가 들릴까? 자신들 있나봐?”
뒷문에서 툭 튀어나온 선생님이 교탁으로 가시면서 말 속에 뼈를 담아 말씀하셨다. 방금도 떠들은 학생은 침을 삼키다가 단맛을 아끼면서 녹여먹는 사탕까지 그대로 목을 미끄럼틀 삼아 꿀꺽 삼켜 질식할 뻔했다. 시험점수가 아닌 내가 큰일 날 위기를 넘겼다.
의자를 끌고, 자리에 앉는 등 반애들의 부산스러운 행동들이 교실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칠판 앞에서 하얀 마커펜으로 교시마다 시험과목과 배분된 시간을 칠판에 쓰시고, 손을 뻗어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떼어오셔서 대략 30분 정도 남은 초침이 31명 모두 보이도록 걸쳐두셨다. 틈틈이 ‘공부해’는 앵무새처럼 반복하셨다. 엄마부터 선생님까지 그놈의 공부 너무 지겹다. 그런 선생님의 강요, 압박 또는 시험 직전의 긴박감 덕인지 교실은 볼륨을 줄인 스피커가 되어 일순간 고요해졌다.
반장은 선생님의 명령으로 1번부터 번호 순서대로 핸드폰을 거두기 시작했다. 핸드폰 꺼지면서 나는 통신사별 종료음이 고요함 속에서 울려퍼졌다. 핸드폰 수거가방이 점차 가까워지자 옆에 튀어나온 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끄려는데 등에서 나를 불렀다. 눈을 돌리기도 전에 글씨가 적힌 핸드폰 화면을 나에게 비추었다.
[비밀이 뭐냐?]
하얀 화면에 적힌 다섯 글자는 내가 이영준을 째려볼 명분으로 아주 충분했다. 이 녀석이? 이어폰 끼고 공부하는 척하고 있었으면서 응큼하게 수빈과의 얘기를 유심히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메시지를 띄운 핸드폰을 받아들고 궁금증 밑에 타자기로 자판을 양 엄지로 타닥타닥 번갈아 쳤다.
[넌 들어도 몰라. 이제 폰 꺼, 반장 온다.]
핸드폰을 집은 손을 위로해서 제 주인에게 돌려보냈더니 곧 핸드폰 모서리로 살짝 팔뚝을 툭툭 건드렸다.
[그럼, 한국사 70점에 네 비밀이란 내 비밀 하나씩 걸고 내기해.]
무슨 내기까지 할 만큼 꽁꽁 숨긴 비밀을 왜 지가 알려고 하는지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그냥 핸드폰은 보기만 하고 돌려주며 손가락으로 동참의사를 밝혔다. 한국사는 암기과목이라서 막상 문제 풀 때 완벽히 외우지 않는 한 헷갈리는 문항이 꼭 한 두 개씩은 있어서 매번 반타작을 겨우 넘겼다. 그렇기에 분명 저 성격상 나와 비슷한 공부량일 것을 알기에 이영준에게도 70점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만일 70점을 맞는다고 해도 가짜를 진실이 개미똥만큼 첨가된 진짜로 둔갑 된다는 미흡하게 계획된 계략이었다.
20번 대까지 온 반장의 핸드폰 수거가방 안 21번 자리에 미리 꺼둔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나를 매끄럽게 지나서 이영준에게 간 가방은 뒷자리에서 허둥지둥 했다. 핸드폰으로 쪽지를 할 때부터 저럴 줄 알았다. 비밀이라고 칭할 것을 알아내려고 하다가 반장의 잔소리로 된통 당한 꼴을 보며 속으로 고소해 피식했다. 그래도 고소함보다 입에서 거의 녹은 체리맛 비밀이 역사적 사건처럼 인상 깊은 수요일 1교시 한국사 시험을 치르기 전 자습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