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27

# 다시 만난 불꽃남자(1)

by SayLI

시계분침이 열일곱 번을 가리키면 점심시간이 끝날 시점, 자판기에서 뽑은 캔음료를 여유를 가진 손에 쥐어들고서 소현과 나는 마트에 있을 세트로 된 상품처럼 교실로 돌아왔다. 신이 난 학생들과 반대로 선생님은 알림판 앞에서 묵직한 등을 분주한 양손을 따라서 움직이고 계셨다. 나는 내 자리 위에 캔음료를 무심하게 올려두고 앞으로 직진만하며 바쁘신 선생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까치발을 들어서 살펴보았다.

선생님은 불길한 기운으로 교실을 메우는 용지의 모퉁이를 압정으로 알림판에 박아 고정하고 계셨다. 슬며시 본 알림판에 붙여진 하얀 용지에 검은 글자로 적혀진 내용에서 엄마의 화난 얼굴과 사랑의 매 그리고 잔소리를 3일의 날짜에 쪼개어 나누어졌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선생님이 칠판 옆 고정하신 용지가 불길하게 느껴진 건, 6년+3년=9년의 공식을 세월을 학생으로 생존하며 장착한 레이더 덕분이지만 언제나 거기까지였다. 일찌감치 희망은 포기하고선 그나마 의롭지 못한 죽음은 피할 미래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공부와 오랫동안 담쌓은 학생이 본 불길한 기운을 담은 A4종이는 고등학교에서 치르는 대망의 첫 중간고사가 바쁜 선생님의 등을 본 시점에서 일주일 남았다는 시험시간표였다. 여덟 과목 그리고 3일로 이루어진 시간표는 꼴에 쓸데없는 자습시간도 가운데 존재했다.


“시험에 그렇게까지 열성적인 줄 선생님은 미처 몰랐는데?”


제 3의 눈을 얼굴만 아니라 등에도 달고 계신건지 선생님이 등 뒤에서 몰래 보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등에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건 선생님이 더 빠삭하게 아실 터였다.


“다른 애들한테도 와서 확인하라고 전해라. 은지야.”


선생님이 내 어깨에 두들기는 손을 올리신 후에 앞문을 통해 교실을 뛰는 걸음으로 나서셨다. 내가 선생님을 불러 잡기 위해 목구멍을 열고 소리치기 전 순식간에 말이다. 사실 내가 전달하지 않아도 반에 원래 인원의 반 정도 있던 애들은 전달사항을 선생님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들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확신하게 된 이유는 선생님이 나가신 순간부터 애들이 시험시간표를 확인하기 위해서 벌써 알림판으로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비보다 몇 배는 빠른 소현과 같은 분류에 속한 애들을 뒤쳐진 좀비들보다 한 발자국 훨씬 앞서서 시간표가 블랙홀 인냥 서있었다.

소현은 시간표에 배치된 과목들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불만이 있어서 짜증이 났나보다. 그런 우리 곁으로 수빈이 병아리처럼 걸어와 내 어깨에 얼굴을 턱으로 찍어 올려 두고서 인상 쓰고 있는 애와 똑같이 시험시간표를 쳐다보았다.


“첫 날, 1교시가 왜 한국사야? 시대별로 외워야 할 것도 엄청 많으면서.”


“넌 외울 수 있잖아? 난 금붕어 기억력이라서 포기했어!”


시험시간표 앞에서도 그저 해맑디 맑은 수빈과는 달리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소현은 짜증을 냈다.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다고 생각한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이었다. 이것이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안하는 아이의 시험을 대하는 큰 차이인가 싶었다. 이와 같은 시험을 대하는 자세로는 단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공부 잘하는 또는 열심히 한 전교 1등의 삶은 모를 뿐이다. 그 뿐이다. 사는데 전혀 지장 없다. 엄마한테는 성적표 때문에 혼나겠지만 말이다.


“나도 음료 먹고 싶어! 같이 가줘.”

책상 위에 올려둬서 표면에 이슬이 맺힌 캔음료를 언제 봤는지 수빈이 날 보고 칭얼댔다. 나는 어차피 벼락치기할 운명이기에 굳이 지금부터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시험에 관한 모든 마인드맵을 떠올리는 일을 사전방지하기 위해 수빈에게 알았다고 답했다. 소현도 시간표에 짜증난 얼굴은 여전했지만 가자는 손짓을 했다. 우리의 반응에 수빈의 입꼬리가 얼굴의 반씩이나 차지하여 씰룩거리면서 만족해했다.

계단 옆 터죽대감인 자판기로 가려는데 앞에 붙은 시험시간표의 등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리에 앉아서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는 이영준이 눈에 밟히기에 자리 앞까지가 큰소리로 ‘야’를 목청껏 불렀다. 얼마나 크게 들릴지는 예상을 안 한 소리는 이어폰을 낀 상태에서도 잘 들렸는지 양쪽 중 오른쪽에 낀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서 무슨 일이냐며 부른 방향으로 턱짓을 했다. 이어폰 줄은 턱짓을 따라서 흔들리며 큰 타원형을 그렸다.

“우리 음료 뽑으러 가려는데, 같이 갈래?”


같이 가자는 권유를 듣고 그는 바로 손을 나의 눈높이까지 올렸다. 손바닥은 내 얼굴이 가려질 만큼 컸다. 그로인해 뒷목이 뒤로 빠졌다.


“난 사이다.”


손바닥으로 거절하며 장난끼가 넘치게 우리끼리 가라는 의사표현과 함께 손바닥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또 심부름은 능숙하게 시켰다. 그동안 잘해줬더니 저 놈이 제대로 미쳤나보다. 우리는 이원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문의 문지방을 방금 느낀 심정을 반영시켜 실내화 밑창으로 있는 힘껏 지르밟았다.

점심시간이 곧 있으면 끝나가기에 딴 길로 새지 말고 종치기 전에는 다녀오자고 생각했다.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외계인의 교신만큼 셋의 보폭은 평소보다 빠르고 컸다. 복도를 얼마나 걸었을까? 복도 모퉁이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목소리가 귀 속을 찌르며 따갑게 자극했다. 하필 자판기 가까이에서 행해져 너무나도 잘 들렸다. 안 들리는 소리라고 세뇌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언성이 내포한 내용 전부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도착한 계단 옆 자판기 앞에 서서 체크카드를 꺼내 꽂으며 슬쩍 상황을 훔쳐보자, 학생주임과 한 남학생이 복도 전체에 높게 울리는 언성이 귀에 들린 내용의 출처였다.


"그러니까, 흉터 말고는 남잔 머리를 기르는 건 교칙위반...”


“심한 직모라서 짧으면 다 뜹니다.”


“나도 말총머리야. 그런데도 난 문제 없잖아? 남자 머리는 짧아야지.”


학생주임이 한 남학생의 복장을 단속하는 장면이었는데, 한창 기 싸움으로 짐작되는 분위기였다. 학생주임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기분 나쁜 말투로 얘기하면 남학생이 받아치는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여학생도 아닌 남학생이 긴 머리를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학생주임 선생님의 불만이 가장 커 보였다.


“아침도 아니고 지금 복장 검사를 하는 정성도 대단해. 학주.”


먼저 사이다를 누르려던 느릿한 내 손가락을 제치고 가장 먼저 소현이 비꼬듯 버튼을 누르며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말을 했다. 선택한 이온음료 캔을 꺼내려 치마 입은 것도 잊고 쭈그려 앉았다가 일어서면서 화가 났는지 발바닥을 바닥에 비벼댔다. 저번에 갈아입을 시간을 놓쳐 체육복 바지를 잠깐 입고 다녔던 사건으로 학생주임 선생님이 이해는 못해줄 뿐더러 너무 고리타분해서 짜증난다고 성을 내며 열변을 토하던 분의 연장선상 같았다.


“그런데, 두발자율화 아닌가? 머리 길다고 벌점 주시면 될텐데. 왜 저렇게 화를 내실까?”


“더 있겠어? 학주가 쟤도 싫어하나 보지.”


조끼와 넥타이는 외박 중인 교복도 교복인데, 두발에 걸린 남자애는 머리카락 길이가 길기는 했지만 자르기 귀찮았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 커트모양이었지 선생님이 길길이 날뛰며 얘기하시는 단발 정도의 기장은 전혀 아니었다. 공부랑 머리카락이 뭔 관계가 있길래 저러실까 궁금하기는 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딴 선생님도 아닌 학생주임 선생님께 걸린 걸 안타까워했다. 그도 그럴게 저러고 잡혀있었던 시간이 꽤나 되어보였기 때문이었다.

학생주임은 ‘남자’라는 단어를 수업 내용에서 중요한 별표마냥 빠트리지 않으셨다. 두발자율화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행되었지만 아직 잔상은 지저분하게 남아있었다. 우리 반에만 하더라도 남자 애들의 머리는 항상 짧고, 긴 머리의 애들은 보기 힘들다보니 남학생 머리길이 규정이 남아 있는 줄은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처음 알았다. 아마도 난 여학생 복장규정에만 예민하고 강박적으로 잘 지켜서 그랬을 것이다.


“염색도 아니고. 길이가 왜 문제가 됩니까?”


학생주임 선생님의 무서운 말투에도 싸가지가 없는 애인지는 단편적으로 본 짧은 장면으로는 판단이 안 되지만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한 부분들에는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씀드리고 있었다. 자칫 대드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는데,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어떠한 면에서는 나완 다른 저 남학생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복도를 지나가는 애들은 힐끔 그들을 쳐다보면서도 그곳만 찬바람 부는 것 같은 분위기에 무서워서 겁먹고는 걸음을 재촉하며 지나가고 있다. 그런 애들처럼 애써 그에게 하는 훈계가 하나도 안 들리는 척 자판기에 있는 사이다 아래 버튼을 꾹 깊게 눌렀다. 이내 둔탁하게 출구로 떨어지진 사이다를 표면에 올라온 기포가 터지듯이 손을 깊숙이 집어넣어 쏙 빼내었다.


“아! 쟤 정대만이다!”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수빈은 저기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인해 대각선으로 나란히 서 있던 소현과 나의 어깨를 양쪽을 밀며 우리로 모세의 기적을 일으켰다. ‘정대만’에 대해 물어본 입과 따로 상체는 미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중심을 잃을 뻔했다. 우연한 사고가 이렇게 난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어디 한 군데라도 다쳤었음 병원비 거하게 청구했을 거다. 그와 달리 아직도 소현과 내 어깨 위에 손 한 쪽씩을 얹고 있는 수빈은 긴 머리의 남학생이 누구인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훈계를 받는 저기 남학생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정보를 우리에게 평소와 다르게 차근차근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런 얘기를 어디서 주워 듣고 오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대체로 그가 속한 8반 애들에게서 얻어온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애들끼리 풍문으로 얘기한다는 건 지금 학생주임한테 주의를 듣는 애는 교내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걸 뜻했다. 난 소문에 대체로 무감각해서 몰랐지만 말이다.


“머리 길고, 얼굴 강렬하고, 농구 좋아해서 정대만이라고 부른대!”


“정대만이 뭔데?”


“헐, 정대만 모른다고? 다들 아는데!”


어째서 ‘정대만’란 캐릭터가 별명이자 꼬리표로 그에게 달려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수빈을 만화책과 애니메이션까지 섭렵한 난 격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거리와 머리카락으로 대부분 가려져 겨우 코와 턱만 보였는데, 그럼에도 저기 혼나고 있는 그의 이목구비에서 만화 속 캐릭터와 비슷한 이미지를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별명 하나는 찰떡으로 가져다가 센스 있게 붙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평소에 만화는 어린애들이나 보는 거라며 전혀 보지 않는 소현은 우리와 달리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수빈은 바로 핸드폰으로 검색해 만화 장면 중에 멋있는 대사를 한 장면을 들이밀며 보여주었다. 그제야 만화 캐릭터를 아는 우리에게 약간은 공감하는 반응을 보였다. 만화의 역동적이면서 세밀한 그림체가 그만큼의 설득력을 품고 있었다,

각자 캔음료 한 개씩을 뽑아 그림자처럼 슬며시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아까보다 높아진 언성은 우리가 지나가려하는 복도를 막았다. 종 치기 전에는 자리에 존재하고 있어야함에도 혼신의 언성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징하게 길기도 했다. 그렇게 속으로만 생각하던 그 때, 총대를 맨 소현이 난감해 하는 나와 해맑은 수빈을 가드하고서 학생주임 선생님의 언성에 맞붙을 정도로 크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곧 점심시간 끝나는데 잠시 지나가도 될까요?”


순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앞의 두 사람의 시선은 우리에게 있었고, 소현의 뒤에 멈춰있는 두 사람은 눈과 입이 쩍 벌어졌다. 확실히 낄 타이밍이 아니었는데도 지나가는 허락을 음료를 들고 차분히 묻는 학생은 없으니 굉장히 당황을 하실만도 했다. 내가 봐도 방금 소현이 한 행동은 이상한 나라에 떨어져 봐야지 나올 수 있는 대범함이었다. 목소리가 날카로운 걸로 봐서는 보복일지도.


“크흠, 그래.”


헛기침을 하시는 학생주임 선생님은 우리에게는 동작을 잘게 쪼개가며 지나가라고 말씀하시고는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살짝 틀어 비켜주셨다. 그 후에는 그의 머리카락를 저격한 굉장히 공격적인 지적이 다시 시작됐지만 말이다. 대범한 소녀의 뒤를 쫄래쫄래 조심히 따라가는데, 별명이 정대만인 그와 예기치 못한 서로의 눈이 맞닿았다. 마주치며 느낀 이 기분은 나에겐 처음이라서 너무나도 이상했다. 너무나도 대놓고 빤히 내 얼굴을 보기에 혹시나 해서 볼을 문지르는 내 손등이 그의 팔에 닿을락 말락 스쳐서 지나갔다.

어째서인지 손등을 감도는 긴장감이 잠시 머물렀다가 팔 사이의 간격이 벌어지며 이내 곧 사라졌다. 그런 감정에서 본 그의 얼굴은 기억에서 잊혀질 수는 있어도, 바라 본 눈동자 속에서는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까만 눈동자가 기억하는 방금 본 소년은 차가왔으나 손에 오래 쥐고 있어서 미지근해진 사이다 같은 인상을 줬다.


“사이다 들고 뭐하냐? 앉지도 않고.”


손에 꽉 쥐고 있는 사이다를 건네라는 이영준의 착한 성품이 드러난 손에 정신이 돌아왔다.


“안, 앉을 거야.”


위로 까딱거리는 손에 순간적으로 약이 올라서는 허리를 옆자리로 숙여서 손이 아닌 책상 위에 사이다를 툭 올렸다. 이런 내 태도에도 이영준은 개의치 않고서 사이다 캔 입구를 따고서 입에 대는데 빠글거리는 탄산 터지는 소리가 옆에 느릿하게 앉는 나에게로 났다. 시원해야할 사이다가 이렇게까지 미지근해진 이유를 묻기는 했지만 답은 안했다.

엉덩이가 학생의 본분을 행하자 종소리가 기뻐서 화답하듯 학교 전체에 울렸다. 바래서 한 눈맞춤은 아님에도 생긴 떠나갈 생각을 안 하는 미묘한 감성을 앞문과 같이 열리는 종소리에 집중하기로 하고서는 책상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내 올렸다. 그렇게 물로 닦인 칠판에는 5교시를 시작한 낯선 하얀 선이 쭉 그어졌다.


***


“이상한 짓하지 말고, 조심해서 가야 한다.”


종례가 언제나 기다리는 선생님의 인사말로 끝마쳐지고, 뒷문으로 뛰쳐나와 코를 위로 들고 도도하게 정해진 발걸음 수로 목적지를 향해 올곧게 걷는 집순이가 여기에 한 명 있었다. 여기서 지칭하는 집순이는 ‘나’이다. 소현은 공부를 하려는 복어보다 독한 의지 하나로 학교에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하고자 자의로 남았고, 그림에 홀려서 허우적대는 수빈은 미술입시학원으로 곧장 전쟁터의 전투기처럼 날아갔다. 꿈을 쫒는 이들에 비해 어딘가 자유로운 베짱이 신은지였다.

돌아가는 길은 오로지 나를 위하여 마련된 20분이었다. 오늘 하루를 보내는 동안 학교에서 많이도 소모된 기력을 충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비워졌다, 채워지고 익숙함 속의 즐거움에 대차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큰 가로수가 심어진 하굣길을 거닐다가 금세 익숙한 아파트 단지까지 체감상 빠르게 도착했다.


“...엄마?”


“은지야! 마침 잘 됐다. 이리로 와봐!


어린아이들이 노는 놀이터 길목에 다다르자 온갖 몸의 신경이 가까운 미래에 다가오는 위험을 미리 알려주었었다. 저기에 존재하시는 집안 서열 1위가 나를 발견하기 전에 당장 여기에서 ‘도망쳐!’라고 말이다. 하지만, 집안 서열 3위는 곧 서열 1위가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바람에 부름에 대한 반항은 개나 줘버리고 영락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꾀를 부리려 짱구를 굴리려 했던 나는 이미 엄마의 열일곱살이 된 자식을 키우며 갈고 닦은 노련한 손바닥 안이었다.

엄마는 입을 크게 벌리면서 어떤 아주머니와 멀리서도 들리는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저기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자신의 딸을 단번에 알아보고는 이리 오라고 부른 것이었다. 나에게는 어른이 계신다는 어색함에 다소 불편한 자리였다.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하고 있을 터인데 엄마는 아주머니께 빨리 인사를 하라면서 뾰족한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여러 차례 툭 찔렀다. 이런 등쌀에 못 이겨 우아한 하늘색 투피스를 입으신 아주머니께 예의바르게 어색한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어머. 은지가 숙녀가 다 됐구나.”


대개 왈가닥하는 모습이 익숙한 우리 엄마와 비교되는 아주머니는 수줍고도 나긋한 억양으로 ‘숙녀’란 명칭으로 나를 지칭하시며 미소 지으셨다. 옆의 친숙한 누군가와 상당한 차이가 났다. 분명히 본인 딸을 망나니라고 했겠지. 그래서 평소에는 잘 듣지 못하는 명칭이 준 민망함이 더욱 몸을 배배 꼬며 어찌할 바를 모르도록 만들었다. 목구멍 속에서 겨우 감사인사를 꺼내어 할 찰나에 입술이 봉해졌다. 그 이유는 엄마가 아주머니께 한 말이 주된 원인이었다.


“연호엄마도 참, 연호에 비하면 얘는 개살구야. 빛 좋은 개살구.”


비유해도 부정적 뜻을 가진 개살구에 빗대는 엄마에게 기분 나쁜 서운함이 마음속을 노크하듯 할퀴었다. 엄마 딸은 나인데, 소중한 딸내미를 무 껍질 벗기듯이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친구 아들을 더 치켜 세워주는지를 엄마 딸로서 이해를 할 노력 따위는 일체 하지도 않았다. 화를 내고 싶지만 아주머니가 계셔서 자존심에서 튀어나온 분을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꿍한 내 심리상태를 아주머니가 어찌 알게 되셨는지 옆에서 아주 호탕하게 웃는 엄마와 달리 양손을 교양 있게 모아 다잡으시고 몹시 보드랍게 나를 보시며 본인의 아들들에 대하여 조곤조곤하게 말씀하셨다.


“아니야, 우리 집은 무뚝뚝한 아들만 둘이라서 은지 같은 예쁜 딸이 부러워.”


“얘가 이래 보여도 살갑거나 상냥한 타입은 아니야.”


“엄마!”


곁에 선 나를 엄마가 실눈을 뜨고 힐끗 봤다. “인정하지?”를 암묵적으로 묻는 눈빛에 순순히 인정하기는 싫었음에도 고개를 소극적으로 끄덕이게 했다. 집에서 엄마의 물음처럼 아빠 또한 피를 나눈 자신의 딸에게 수시로 하는 질문이었다.


"무뚝뚝해진데다 점점 말 수도 줄어들고, 그래서 걱정은 되는데...”


“우리 애한테 시켜. 어릴 때에는 둘이 손도 잡고 다니고 그랬는데. 그렇지, 연호엄마?”


아주머니 아들의 무뚝뚝한 성격과 뜬금없이 소환된 작은 손가락으로 코딱지를 파는 순수한 아이와의 연관성을 대한 이해도를 동공보다 커진 흰자가 확인시켜 주었다. 열일곱살의 주인공 아가는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얼굴도 모르는 무뚝뚝한 남자애와 내가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나는 그러지 말라고 엄마의 옷 끝자락을 잡고 아래로 두 번 잡아 댕겼다. 하지만, 긴급한 신호 전달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잔잔히 미소만 보내고 계셨다.

실패를 일찍이 맛본 후, 몰래 집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계속 비는데 자전거 한 대가 이 쪽으로 굴러 와서는 아주머니 앞에서 브레이크를 끼익 소리가 나게 밟았다. 바닥에 둔 내 시야에선 빨간 캔버스화와 우리 학교의 교복 바지 끝단만 보였는데 앉아서 몸으로 인사를 했다는 걸 알 만큼 자전거 앞바퀴가 크게 들썩거렸다. 이를 본 엄마의 입이 아주머니에서 그녀의 아들로 대상을 옮겨갔다.


“연호구나, 난 또 누군가 했지 뭐니. 옆에는 은지. 은지 기억나지?”


“네.”


나를 안다는 대답을 한 동굴에 들어간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연호라는 남자애를 보았다. 남자애의 얼굴을 본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오늘 제대로 마가 낀 날인가 보다. 운수가 아주 좋다던가.


“아줌마들은 저기서 얘기 좀 더 하려는데. 은지 좀 지켜봐줄래? 쟤는 툭하면 집으로 도망가거든.”


“내가 언제 도망을 가!”


필요 이상의 정보누설에 반사적으로 경악해하는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꼭 내가 창피하다고 느낄 법한 얘기를 남들에게 발설했다.


“얘가 왜 성질이야! 엄마가 없는 말한 게 아니잖아?”


한껏 예민하게 반응한 나에게 엄마는 면박을 주었다. 어쩌다 시작된 두 모녀의 말다툼을 자전거를 세우고 안장에 앉아있던 머리 긴 남자애가 가뿐히 내려서 무표정으로 대항하며 쿵쿵거리는 내 몸놀림을 지켜보고 있었다.

차츰 강하게 느껴지는 햇빛에 말다툼을 그만둔 엄마가 흥분된 호흡을 가다듬으며 학교에서부터 어색한 이 남자애와 같이 나무 그늘 밑에 남겨둔 채로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곳으로 아주머니와 함께 걸어갔다. 여러 나무 그림자로 생긴 좁은 그늘 아래에 우리 엄마의 부탁이란 이름의 강요로 둘이 나란히 서있게 되자 무심결에 옆의 그를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게 되었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간 시선은 내 키를 넘어 한참을 더 올라갔다.

조금 긴 머리는 점심시간과 똑같았고, 조끼와 넥타이는 안한 주제에 명찰은 아주 예쁘게 달아놓았다. 걸친 교복마이의 ‘정연호’란 세 글자의 이름이 적힌 초록색 명찰은 오른쪽 가슴께에는 하얀 실로 애정을 담은 듯 정성스럽게 손박음질이 되어있었다. 촘촘히 박음질 된 명찰이 옆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나란히 서 있는 남자애와 정말 안 어울렸다.


“같은 정씨구나.”


명찰에서 작게 나온 혼잣말처럼 어색하기 그지없는 그늘 밑에서 그저 조용히 풍경만 바라보자니 지루함에 미칠 노릇이었다. 솔직히 우리 엄마가 지켜보라고 했다지만 타고 온 자전거도 다른 그늘에 세워두고 왜 나랑 있는지 예측조차도 안 되서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걸어보기로 했다. 무시는 안 하겠지. 뭔 생각을 하는지 저 긴 머리 뚜껑을 꼭 열어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을 알아내리라.

“있잖아, 동갑이니까 말 편하게 해도 돼?”


어색함에 옆에 있는 이 남자애에게 편하게 말을 놓자는 제안을 했다. 안 그러면 어색한 분위기가 더욱 어색할 것 같았다.


“벌써 편하게 하잖아.”


어색하게 걸어 온 말투에 어딜 보는지 모르는 그가 듣고 성격이 보이는 대답을 했다.


“그럼, 이왕 편해진 김에 허리 좀 잠깐만 숙여 줄래?”


도리어 당당한 듯 뻔뻔한 내 요구에 몸을 돌려 순순히 허리까지 숙여 준 정연호와 발을 맞닿게 섰음에도 한참 위에 머리가 있어서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발뒤꿈치를 그의 턱밑까지 가까스로 쳐들었다. 그리고 내 손목에 있던 머리 고무줄로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작은 꽁지머리를 묶을 수 있었다. 그의 키가 진짜 커서 내 짧은 다리로 까치발을 해서 버티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묶은 참한 머리에 뿌듯함이 내 표정을 물들였다.


“역시, 이 쪽이 훨씬 멋있는데 왜 가려? 머리 짧게 안 해도 얼굴은 드러내고 다녀.”


진심을 다해 그에게 전했다. 머리를 뒤로 묶어서 그의 얼굴이 전체적으로 훤히 드러나자 진한 눈썹과 큰 이목구비가 먼저 눈에 띄었다. 느끼하지 않게 적당한 조화를 이루는 진한 쌍꺼풀과 뚜렷한 콧날, 각진 옆 턱의 윤곽선은 오히려 멋있다는 감상을 내놓았다. 얼굴에 콤플렉스나 문제가 있나 했더니 가려진 머리카락 사이의 얼굴은 내 눈에는 맑으면서도 오늘의 햇빛처럼 청량했다. 그 때문에 못난이 같은 거울 속 내 얼굴이 떠올랐기에 지고만 기분이었다.

누구나 호불호 없이 잘생겼다고 칭찬할 얼굴을 보다가 나를 향한 그의 읽을 수 없는 묘한 기색에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멈춘 그의 얼굴을 90도로 돌려봐도 멍하니 한 곳에 초점을 두고 바라보는 눈에게 다시금 말을 걸었다


“저기,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

들었는지 미간과 함께 의심하는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눈을 껌뻑거렸다. 큰 눈의 감았다 뜨는 움직임에 긴 속눈썹은 바람에 날리는 커튼처럼 살랑거렸다.


“그런데, 네 눈 진짜 예쁘다. 속눈썹도 나보다 훨씬 길고.”

아무렇게 짓거리는 감탄사가 걸러지는 과정은 과감히 생략하고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래봤자 좋을 거 없어. 다들 눈 피하고...”


눈가에 대한 나의 칭찬을 달가워하지 않고 언짢아하는 태도로 더 이상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도록 바지주머니에 꽂고 있던 투박하고도 큰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한꺼번에 가렸다.


“난 안 피했잖아?”


손으로 얼굴을 가렸던 그의 벌려진 손가락 사이로 눈을 피하지 않고 말한 나를 구석구석 살피는 눈길이 느껴졌다. 만화에서는 보통 이런 비슷한 상황의 컷에서는 귓가가 빨개져 있는 것에 반해 정연호에게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부끄러워서 하는 행동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보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까 전에 내 말 듣고 있다는 대답은 혼신의 구라였다는 사실이었다. 기껏 묶어놨더니 가리고나 말이야. 그래도 여기 그늘 밑이 굉장히 어색하던 아까보다는 덜 어색해졌다고, 그렇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 맞다. 아까 일부러 본 건 아니야.”


문득 떠오른 오늘 점심시간에 보게 된 일에 대하여 제 발이 저리기 시작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수를 했다. 어디 마음 한구석에서 신경이 쓰였었나보다.


“그냥 애들이랑 음료수 뽑으러 거기 있었던 거야. 이상한 오해하지 말라고...”


막상 사건의 경위와 전말을 당사자에게 자수를 하고나니 괜히 더 이상해졌다. 하던 얘기와는 엉뚱한 주제를 꺼내 애써 덜 어색하게 만들었는데 또다시 어색했던 조금 전으로 되돌아가게 생겼다. 멍청하게 괜히 설쳤다. 키가 큰 정연호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난 지능적으로 키가 작은 고개를 반대로 돌려서 나댔던 스스로에게 반성의 탄성을 속으로 내질렀다,

고개 돌릴 자신은 없어서 동공을 초능력자 마냥 굴려서 다시 분위기를 살폈다. 실수라고 생각해 겸연쩍어져 어색하게 입가를 당겨 올린 나에게 그는 얼굴에 손을 내리고 여전히 무뚝뚝한 투로 딱 한 마디를 했다. 돌아온 말은 예상한 답보다는 훨씬 단순했다.


“봤어. 음료수캔 들고 있던 거.”


“그것만 본 거였어?”


“뭘 봐?”


“아니야, 아무것도...”


붙임성은 없으면서 둔하게 묻는 말에 왜인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저 3명 중에 어느 한 명이겠거니 두리뭉실하게 얘기했다고 혼자만의 결론이 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첫인상을 괜히 눈동자에 담았다. 자존심이 상해서 정연호에게 정확히 내가 어떤 종류의 음료를 들고 있었는가를 세세하게 물어볼까 했지만, 오히려 더 이상해질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애초에 언급하지 말 걸 그랬다. 모르는 게 약이란 속담은 지금 나에게 적용되는 삶의 진리였다.

학생끼리, 그것도 동갑내기의 대화인데 이어나가기가 어째서인지 어려웠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는 정연호와 다시 나란히 서 있게 된 나무그늘 밑에서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리 먼저 대화거리를 제시해 봐도 몇 마디 안가서 결국 끊겨 버렸다. 그렇다고 대답을 잘했는가? 퍽이나, 그는 매우 딱딱한 목석같았다. 그래서 화풀이로 발을 앞뒤로 바닥 긁는 소리를 내면서 발 주변의 애꿎은 돌멩이 여러 개를 연속으로 찼다.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은 돌멩이들은 내 발에 차였다는 명분을 가지고선 부럽게 그늘을 빠져나갔다.

“너 오기 전에 엄마들끼리 우리 어릴 때 얘기를 하는데, 난 기억이 아예 안 났거든?”


하늘을 본 발등 끝에 닿은 저 편의 끝날 기미를 못 찾은 엄마들의 수다에서 겨우 떠오른 말이었고, 당연히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기억에 덮어씌어져 오래전에 지워진 아이에게서 나온 순수한 물음이자 어색한 우리 사이 속 적막에 들리는 나뭇잎이 상쾌한 바람에 부딪히는 음률에 한 스푼 곁들였을 뿐이었다. 그만큼 조용함이 정말 싫었다. 그런데, 덤덤한 내 반응과 같을 줄 알았던 정연호는 자신의 감각을 고슴도치 등에 자라난 가시처럼 바짝 곤두선 듯 어깨를 움찔했다는 걸 나뭇잎 그림자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가방이 직접 묘사했다.


“넌 혹시 기억 나?”


가방을 주워들기 위해 몸을 숙인 그처럼 나 또한 조금 숙여 되묻자, 떨어져 있는 가방끈을 잡고 올라오는 정연호의 얼굴이 딱 마주했다. 두 코끝이 종이 한 장 두께의 차이를 두고서. 너무 가까운 얼굴에 놀란 나머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자 본능에 무방비해진 팔뚝을 덥석 잡히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의 긴 어색함이 긴장감으로 일순간에 바뀌었다. 그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표정 덕분에 더욱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었다.

형태가 바뀌는 나무그늘 밑을 잠식한 긴장감을 깬 건 엄마가 마트로 장보러 가자는 큰 외침이었다. 엄마의 목소리 성량은 상상을 초월했을 만큼 대단했다. 인간 확성기인가? 어째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에게 신신당부를 하며 잡아두라고 한 이유를 그 때서야 깨달았다. 어쩐지 정연호에게 잡아두라던 폼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하지만 그 때문에 번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데, 바로 눈앞에 떡하니 있는 잘생긴 얼굴로 인해 바보가 된 입이 옹알이처럼 떠듬떠듬 떼어졌다.


“이, 이제 감시 안 해도 돼! 소오, 리 들었지?”


엄마들이 서있던 방향을 슬쩍 보고서 팔뚝을 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며 정연호가 천천히 일어섰다. 내가 신은 운동화는 주춤했다.


“어, 음... 또, 봐! 정연호.”


갈 곳 잃은 눈동자의 시선은 흔들리는 그늘 밑을 벗어나 내가 뒷걸음질 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도망치는 상대가 바뀌고서 엄마에게로 피신하는 발걸음이 발을 뗄 때마다 시뻘게졌다. 잠깐 스치듯 본 그늘 밑 남자애는 바지에 손을 꽂고 그늘 밖을 나선 나를 보고 있다. 십칠년간 쌓아올린 요새 안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아직은 얕은 감정은 낯설었다. 그래서인가 왜인지 서투른 걸음마로 재촉하는 엄마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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