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난 불판 위에서 함유되어 있던 기름으로 노릇하게 구워진 그 많던 고기가 더러워진 기름으로 변신해 종이컵 하나를 가득 채울 때 쯤, 몇 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즉흥적으로 소화를 책임지는 위의 생사는 뒤로한 채, 여기서 더 주문할 것인가를 두고서 눈치게임의 서막을 알렸다. 불시에 시작된 게임과는 다르게 불판은 종이컵으로 내려가지 못한 돼지기름은 신경전 배경음으로 지글거렸다.
긴장감이 불판으로 인해 뜨거워진 땀방울과 흐르는 가운데 수빈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길게 울렸다. 수빈은 핸드폰에 비친 강아지 이모지에게 걸려온 전화를 확인한 뒤, 보지 말아야할 뭔가를 봤다는 반응을 보이며 몸서리를 쳤다. 너무나도 지나친 거부 반응에 소현이 물었다.
“누구 전화인데? 피디?”
“자기 여자친구한테 목줄 묶인 놈!”
수빈이 한 문장으로 서술한 인물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어째서 저장한 이름이 강아지 이모지인지 알겠다. 그 때문에 뇌 주름에만 끼워 남겨두려던 말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와 버렸다.
“이영준? 걔 여친 생기고서 우리랑 연락 잘 안 했잖아.”
“그러니까. 그런데 소재거리 생길 느낌인데! 받아볼까?”
“받아 봐. 헛소리하면 욕하면 되니까.”
소재거리에 영혼을 급매하여 팔아버린 수빈은 곧바로 스피커폰으로 그의 전화를 받았다. 의도치 않게 목적성이 생긴 통화를 하게 됐다. 수빈은 소재, 소현은 욕설, 은지는 구경으로 정의가 된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전화를 받아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우리의 귀 한 쪽씩이 핸드폰에 점차 모이며 가까워지고 있는데, 핸드폰 반대편의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좋지 못했다. 울던 도중인지 핸드폰 볼륨을 올려도 발음이 명확하게 들리지 않아서 귀가 가까이 갔음에도 속이 답답할 지경까지 도달했다.
“야, 말 똑바로 해. 뭐라는지 전혀 못 알아 듣겠잖아.”
소현이 답답했는지 전화기에 대고 약간 짜증냈다. 그 후 잠시 정적이 흐르다 목을 가다듬고는 점차 영준이 하려던 말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 헤어졌다고, 여자친구랑. 전화 받자마자 욕부터 나오고 매정하다, 너네?
“네가 욕 나오게 먼저 했잖아. 이 호구야.”
"맞아! 그런데 어떻게 헤어졌어? 자, 어서 얘기해봐!”
얘네가 그동안 연락두절이던 영준에게 떨쳐내지 못한 앙금이 남아있나 보다. 그런데, 사실 여자친구와 뜨거운 연애로 인해 우리와 연락을 끊었으면 계속하지 말아야지, 헤어지고 나서 우리가 필요해지자 연락했기에 핸드폰에 대고서 욕을 한 일은 정당성이 부여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굳이 그에게 그 뜻을 알려주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지금은 수빈의 소재에 대한 직업정신이 정말로 대단할 뿐이다. 헤어진 과정을 세세하게 물어 볼 준비까지 프로답게 마친 상태였으니 말이다. 소재라면 뭔 짓이라도 저지를 소름끼친 눈빛도 포함이다. 나였으면 실전으로 옮지기도 못했을 행동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최소한 헤어져 위로를 원하는 안쓰럽고도 불쌍한 놈에게 너무 야박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야, 우리 삼겹살 먹고 있는데. 올 수 있으면 오고.”
- 너희 어딘데?
동정에서 나온 나의 권유에 영준의 목소리가 살짝 바뀌면서 우리의 현위치를 물어보았다.
“지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놈 입에 넣어줄 고기는 없다.”
고기를 넣은 상추쌈을 입에 물고서 소현이 칼같이 답했다. 그래도 정이 많은 애들이라서 막상 영준을 위로를 안 해줄 애들이 아니겠지만 분노가 담긴 잔소리를 좀 할 건 부정하지 않겠다. 그래서 딱히 걱정은 없었으나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밑밥은 깔아두어야 했다.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소현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스피커폰에 소리가 흘러가지 않고 소현만 들릴 정도의 아주 작은 소리를 귀에 대고서 급하게 준비한 미끼를 던졌다.
“쟤 오면 고기 더 시킬건데, 그럼 그걸 핑계로 더 먹어도 되잖아. 일석이조야 안 그래?”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어린 양을 손쉽게 회유하였고, 풀어진 그녀의 얼굴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다행히 먹혔다. 미끼란, 정말 전지전능하다. 이 순간만큼은 그렇다. 한계까지 배가 부르면 토라진 이 둘도 영준이 뭘 얘기하더라도 덕이 높고 인자하신 부처님으로 빙의하여 보살필 거다. 목적을 달성한 나는 아직 통화 중인 핸드폰에 대고 그에게 장난 반과 진심 반을 적절히 섞어서 통보를 했다.
“이영준, 장소 찍어 줄 테니까 늦으면 죽는다."
- 최대한 빨리 간다. 기다려.
우리가 있는 고기집 위치를 바로 보내주고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다시 입맛을 다시며 젓가락을 든 것이 무색하게 네모난 불판 위에 남아있던 고기들은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있었다. 위는 포만감을 느끼지 못해 화가 났는지 성대를 시켜 자신의 분노를 표출 시켰다.
“그 많던 고기, 다 어디 갔어?”
“굼뜨니까 내 입으로 다 들어갔지!”
"당당하게 말하니까 끊은 욕이 다 나오려고 해.”
나의 들끓는 분노에 수빈은 오히려 약 올리듯 해맑고 행복한 얼굴로 오물거렸다. 결국, 아쉬운 사람이 식당 이모를 불렀다. 기왕 주문하면서 삽겹살을 더도 덜도 아닌 4인분으로 주문했다. 어차피 올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으니 다 먹는다.
그러다 문득 이런 비슷한 상황이 번뜩 기억이 났다. 이 때문에 묘한 기시감까지 들었다. 이영준과 관련된 일임은 장담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한데 뿌연 안개 같이 흐릿한 기억이라서 같이 식사 중인 둘의 기억도 취합해 보기로 했다. 하나보단 여러 개가 더욱 유용하니 말이다.
“이런 적 옛날에도 있었나?”
“난 유명한 탐정이 아니야! 정확하게 얘기 안하면 몰라.”
“호구한테 전화 왔으니. 걔랑 관련 됐겠지.”
유추를 토대로 소현과 수빈이 같이 골똘히 생각해 보는 듯 싶었다. 10년이라는 고개를 넘어가는 기억이라서 잘 안 떠오른 모양인지 수빈이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그러다가 소현보다 먼저 번뜩 생각이 났는지, 쌍꺼풀이 쏙 들어가며 눈이 커지더니 벌렁거리는 콧구멍과 같이 입을 벌어졌다.
“있다! 중학교 때부터 사귀던 여친이랑 헤어지고 우리 앞에서 청승 떨은 거.”
***
내 자리가 어쩌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셋의 만남의 광장이 되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아도 되어서 최고라지만,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단점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번 오는 쉬는 시간마다 우리는 노닥거리면서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다. 학생의 본분은 10분이란 짧은 쉬는 시간에는 영구 휴업상태였다.
떠드는 세 여학생들 바로 옆자리 내 짝꿍 놈이 쉬는 시간에 움직이지도 않고 엎드려 퍼질러 잤다. 누가 본다면 저 좁은 책상 위가 폭신한 자기 방 침대로 알 정도이다. 혹시나 우리의 대화 내용이 들릴까봐 평소에는 보지도 않는 눈치가 보였다. 나만 눈치가 보였던 건 아니었는지 내 자리고 놀러온 둘도 나와 얘기하다가도 짝꿍 방향으로 눈을 힐끔거렸다. 그 눈짓이 무슨 사람이 아닌 경계하는 미어캣 두 마리와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았다.
“얘 말이야. 쉬는 시간마다 저러고 자?”
소현이 짝꿍인 나에게 짝꿍에 대해서 뭐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이 물었다.
“수면부족인가 보지! 밤마다 뭐하나? 넌 알아?”
그에 대한 물음표를 단지 짝꿍이라는 이유로 모두 나에게 넘겼다. 하지만 나 또한 수업시간 이외에는 일어나 있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답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오히려 옆에서 자고 있는 짝꿍 놈에 대해 신경이 쓰여서 똑같이 물어보고 싶은 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나도 잘 몰라.”
“짝꿍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지! 그래야 어떤 애인 줄 알지.”
“그럼, 너는 네 짝꿍에 대해서 잘 알아?”
자기 짝꿍에 대해서 잘 알아서 나에게 저리 말하나 싶어서 약간 비꼬아서 되물었다. 비꼬았던 내 심정과는 다르게 수빈은 상대적으로 해맑았다.
“아니? 아직은 잘 몰라! 걔는 나 피하던데.”
“그러면 내로남불이시네요. 배수빈씨.”
아무래도 그저 내가 알고 있고, 내 짝꿍인 그에 대해서 술술 말할 줄 알았던 호기심에서 비롯된 듯 싶다. 그리고 수빈의 짝꿍도 얘가 물불 안 가리고 자신의 정보 수집을 해대니 부담스러워 피하는 걸 거다. 우리는 옆 짝꿍 얘기에서 빠져나와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 내용은 대부분 영양가는 포함이 안 되어 있으나 쉬는 시간을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우리가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좁은 책상에서 잠자는 데 시끄럽게 느껴졌는지, 양팔로 엎드려서는 코도 안 골고 조용히 자고 있었던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우리가 순간 놀라서 굳어있는데 얘는 얼마나 잤는지 앞머리도 같이 기상한 상태였다. 항상 수업시간에 앉아있거나 엎드려있는 모습만 봐왔기에 일어난 형체가 큰 덩치 때문에 상당히 압도했다.
“우리 때문에 깼어? 미안.”
위로 올려 본 그의 표정을 해석하자 머리에선 사과의 말을 꺼내라는 빨간 깜빡이가 켜졌다.
“아니, 그냥 교과서 꺼내려고. 니들 얘기 계속해.”
쌀쌀맞은 표정과 다른 담백한 반응이었다. 진짜로 잤었던 걸까? 우리는 눈동자는 뒤돌아 사물함으로 가는 그를 쫓았다. 그와 거리감이 생기자, 그제야 갓 태어난 새끼 양처럼 움직이기 시작하는 몸은 첫 숨을 내뱉었다. 그런 우리를 자신의 시야 속에서 치운 것인지 그는 사물함에서 꺼내온 역사교과서를 책상 위에 가볍게 던지더니 자리에 앉아 다시 잠을 청했다.
놀람이 사라지자 아까 전에 그의 말끝이 왠지 촉촉했다는 기분이 어렴풋이 들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냥 내가 압도당해 느낀 기분 탓으로 넘기기로 했다. 짝꿍이라는 분류 외에는 친한 사이가 아니고, 괜히 저번처럼 이상한 오해로 변질될 수도 있으니 괜히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네 짝꿍 이름은 알아?”
단체사진 찍는 날 소현의 이름을 몰랐던 걸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는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물었다. 나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하고서 입술을 작게 열고 닫기만 하고 있었다.
“이영준.”
세 개의 목소리 말고 대화에 미성의 남자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 옆자리로 고개가 모두 다 같이 돌아갔다. ‘이영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엎드린 상태는 그대로지만 두 눈에 쳐다보는 눈동자를 내놓고 있었는데, 곧바로 갯벌의 게가 눈을 감추듯이 엎드렸다.
성격이 급한 소현은 ‘이영준’ 이름이 들은 대로 구성된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출석부가 있는 교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교탁 모서리에 자리하고 있는 출석표를 휙 펼쳤다. 학기 초에 제출한 증명사진 밑으로 적혀있는 이름을 소현은 손가락을 밑으로 밀어 내려가면서 그와 똑같은 얼굴을 찾았다.
“맞네, 이영준.”
출석표를 통해 확인을 마치고 고개를 든 소현의 곁으로 수빈이 다가갔다. 수빈도 사진과 그 밑의 이름을 보고서는 나에게 손가락으로 맞다는 오케이 사인을 머리 위로 보냈다.
“그렇구나.”
“야, 영혼은 불어 넣지?”
본인이 말했는데 설마 거짓말인가 싶었었기에 심드렁한 대답이 나왔다. 때마침, 클래식을 기계식 종소리로 해석한 수업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교탁 앞에 있던 둘은 수업종이 마무리되기 전에 후다닥 학생으로서 있어야할 자리로 돌아갔다.
날쌘 둘과 비교되게 내 짝꿍 이영준은 울리는 수업종이 알리는 기상 신호는 무시하고서 모르페우스와 아주 긴 꿈 속 미팅을 지속했다. 그곳에서 만난 모르페우스가 마음에 들어서 일어날 생각이 없다는 걸 미동 없는 몸이 전달해 주었다. 수업이 시작되면 알아서 깨겠지. 내가 혼나는 사태가 일어날 일은 없을테니 그냥 엎드려 자고 싶어 하는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정확히 5분의 수업시간이 줄은 뒤, 앞문이 열리면서 우리 반 금요일 5교시를 담당하는 사회선생님이 경쾌하게 학생들과 인사를 하시면서 입장하셨다. 선생님의 퍼트리시는 에너지가 점심시간 후 다소 가라앉아 있었던 반 분위기를 밝게 살려놓으셨다. 임시반장에서 반강제로 진짜 반장이 된 지훈이 선생님께 차렷과 경례를 외쳤다. 반장의 외침에 반 애들의 목소리들이 겹쳐 한 목소리로 인사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잠깐, 저기 자고 있는 애 좀 깨워라.”
노트북을 교실 TV모니터와 연결 중이신 선생님께서 아직도 엎드려 자고 있는 이원준을 깨우라고 말씀하시자 반에 있는 모든 시선들이 우리 자리에 모였다. 나는 깨우라는 무언의 압박을 담은 시선들을 이길 방법은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석상처럼 미동 없는 그를 흔들었다.
“저기, 선생님이 일어나래. 일어나.”
흔들리는 몸 때문에 그가 일어나기는 했다. 단지 스프링이 튀어오르는 모습과 똑같이 방금 일어나 비몽사몽한 부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교실에는 다양한 웃음소리들이 수업 시작 전에 교실 안을 구름처럼 뭉게뭉게 떠 다녔다.
선생님은 웃음소리를 정리하시고는 가져오신 마이크로 수업을 시작하셨다. 칠판에 집중하는 반 애들과 같이 수업에 도통 집중하지 못하고 왜인지 저 짝꿍 놈의 부운 눈이 괜스레 눈에 밟혔다. 그러나 부운 눈에 대한 깊지 못한 생각은 선생님의 빠른 칠판필기 속도를 어떻게든 따라잡아야 가야하는 뇌의 집중력 과부하에 의해 금방 잊혀졌다.
***
학교에서 해내야 할 사이클을 끝내고 드디어 종례시간이 왔다. 학생이라면 이 시간을 눈이 빠질 만큼 기다린다. 임무를 완료하고 보상으로 집으로 간다. 고생 끝의 낙이 왔다. 하지만 종례시간에 제일 중요한 담임선생님인 진석쌤은 그 풍성한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아서 애간장이 탔다. 그 사이 벌써 소현처럼 책가방을 멘 애들도 몇몇 있었다. 그런데 옆자리 짝꿍 놈은 7교시가 끝나 종례시간이 된 아직도 숙면 중이시다. 그렇게 하루종일 잠만 자는데 목에 담은 안 오는지 내 입장에선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문이 열리며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종례를 위하여 급하게 뛰어 오셨는지 가쁜 숨을 몰아 쉬셨다. 아무래도 선생님은 운동부족이라고 혼자서 조용히 생각만 했다. 선생님은 뛰어오신 만큼 빠르게 안내사항을 전달하신 후 조심히 가라는 말씀을 덧 붙이셨다. 오늘 긴 하루에 비해 종례는 짧아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청소당번인 수빈에게는 의미가 없었지만 말이다.
“은지, 집 가는 길에 닭강정 먹고 가자.”
“그래. 네가 사주는 거지?”
“누구세요?”
야박한 것, 소현은 돈 몇 푼에 친구를 버렸다. 그러고 보니 온통 먹을 생각만 하다가 수빈이 오늘 제일 더러운 2분단 청소당번이라서 바로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나의 머릿속 생각을 눈치를 챈 소현은 좋은 방법을 나에게 제안하였다.
“내가 배수빈 청소 빨리 끝내게 하고 갈 테니까. 너가 가서 주문하고 있어.”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갈게.”
뛰듯이 복도를 지나 계단을 앞꿈치로 빠르게 밟고 내려가서는 실내화를 급한 마음처럼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문으로 향하는데, 학교 급식실 옆 정자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이영준이 눈에 띄었다. 그라는 걸 바로 알아챈 이유도 교실에서 본 가방과 그의 곰만한 덩치 때문이었다. 왜 눈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닭강정 보다 오늘 본 부운 눈에 대한 흥미가 내 발걸음을 그곳으로 돌려버렸다.
대놓고 그에게 다가가기에는 한 번 대화한 일이 전부라서 급식실 벽에 몸을 어설프게 감추고 고개만 빼꼼 내놓은 채로 염탐했다. 벽에 붙어서 쟤는 저기에서도 자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를 집중해서 빤히 쳐다보는데 아래로 숙인 고개에서 투명하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밑으로 여러 번 떨어졌다.
“설마 쟤 울어?”
“야, 가서 주문하고 있으라니까. 여기서 뭐해?”
경찰을 지켜보는 도둑처럼 몰래 벽 뒤에 숨어서 이영준를 지켜보다 말을 거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왜 저러고 있냐는 눈썹 2개의 주인인 소현과 청소를 끝내고 호기심으로 같은 쪽에 관심을 보이는 수빈이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혹여나 숨어서 보고 있던 일을 그에게 들켜버릴까 싶어서 손가락을 입술산에 가져다 대고는 두 여자에게 말했다.
“조용히 해, 쉿!”
“뭔 쉿이야. 빨리 가야한다고.”
배고픔에 빨리 가야한다는 말 뒤로 지친 애들이 곧 몰린다며 소현이 타박했다. 옥신각신하는 우리의 실랑이가 이영준이 앉아 있는 정자까지 들렸는지 그가 우리가 있는 급식실 옆을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조용히 부운 눈에 대한 호기심만 채우고 없었던 일로 만들어 완벽범죄에 버금갈 정도로 처리하고 가려했는데, 나의 계획대로 이루지 못하고 입으로 물인지 침인지 구분 안갈 것을 시원하게 엎어 버린 것이다.
“너네 거기서 뭐하냐?”
급식실과 정자의 거리가 있음에도 그의 물음은 발음 하나하나가 또박또박 귀에 박혔다.
“우리? 닭강정을 누구보다 잘 먹기 위한 플랜을 찾는 중인데?”
당황함이 묻어나는 몸짓은 결국 핸드폰을 가리키면서 일시정지 되었다. 그냥 갈걸. 망했다는 얼굴을 한 나와 이마를 탁치는 소현, 그리고 눈을 반짝이는 수빈을 본 이영준은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계속 쏘아댔다. 그깟 부운 눈이 뭐라고 벽 뒤에 숨어있던 내 행동에 후회막심이었다.
어두운 낯빛으로 보았을 때, 이 장면에서 구조해줄 변명은 이미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다. 쥐구멍이라도 하나 만들어 주고 가지 그냥 가버렸다. 한국인이라면 필수 덕목인 정도 없이 말이다. 오, 신이시여. 이러시기 있으십니까? 이제는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이 요단강을 건너버렸기에 뒤돌아보는 대신 배를 째고서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래, 네 그 팅팅 부운 눈이 궁금해서 그랬다! 왜!”
“쟤 눈?”
눈 타령을 하는 나에게 어리둥절해 하는 소현이 되물었다.
“어. 방금 전에도 눈물 떨구는 것도 봤는데...”
“헐, 너 쟤 울렸어?”
내가 울렸다는 듯이 말하는 소현을 향해 "아니!"라고 교내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귀청 떨어지게 소리까지 지를 정도냐고 물었지만 난 많이 억울했다. 눈동자를 돌려 이원준의 눈치를 보는데, 그의 빨개진 눈가에 물기가 점막에 조금 맺혀있었다. 정자에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정자에서 울고 있던 건 진실로 드러났다.
막상 저 눈가 물기를 보았더니 지금 이렇게 된 문제 상황 속에서 관계가 심히 이상했다. 여기 둘처럼 친구도 아닌 표면상 짝꿍인데 궁금하다고 소리친 시점에서 그는 원하지 않은 오지랖이 되어버렸다. 어린애도 아는 예의를 늦게 알아차리다니 이젠 진짜로 망했다.
이 상황은 더 이상의 회생은 불가능하다고 결론나자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로 소현과 수빈을 데리고 튀기로 1초 만에 마음먹었다. 그런데, 하필 또 그의 눈가에 맺혀있던 물기가 더욱 커진 물방울이 되어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을 목격하고 말았다. 양심에 수북하게 털이 난 애라 모른 척해야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당황함이 이영준에게 소리치듯이 말했다.
“잠깐만! 내가 괜히 물어봐서... 미안해, 미안하니까 제발 나쁜 년으로 만들지는 말아 줘.”
바닥에 떨어져 흡수되는 물방울들을 보면서 내가 애원했다. 미안한 감정이 있는 것도 맞지만, 하교 시간이라 학생들이 지나가고 있어 쳐다보는 눈이 많았고, 담임인 진석쌤의 귀까지 알려진다면 교무실 호출은 당연지사였다. 그것만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아야 했다.
“상상과 현실은 차이가 크네. 세상 추하다.”
“그게 우는 애 앞에서 할 소리야?”
“애초에 네가 안 건드렸으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났어. 안 그래?”
악독한 평론가처럼 쥐 죽은 듯 우는 애와 애원하는 애에게 추하다는 적나라한 평론을 한 소현이 확인사살까지 맛깔나게 했다. 그녀의 평론은 낱말들 모두가 맞는 말이라서 반박은 일말의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이 드라마는 장르가 뭐야? 로맨스? 공포? 스릴러?”
미칠 것 같은 나를 본 수빈이 순수하게 지금 닥친 상황이 어느 장르에 해당되는가를 물었 다.
“잘 봐. 이게 진정한 사랑과 전쟁이야.”
수빈의 어깨에 오른팔을 올리고, 왼손으로 턱을 잡아서는 지금 일어난 장면에 포커스를 맞추며 소현은 수빈에게 컴퓨터처럼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그러자 수빈은 사건이 더 발생되어 재미를 줄 것을 기대하는 얼굴로 두 눈을 반짝거렸다.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죽이 척척 맞아서 난 어안이 벙벙하였다.
어찌됐든 간에 불편한 하굣길 한복판에서 계획을 약간 수정하더라도 한 시라도 빨리 이 곳에서 탈출하기로 했다. 많아지는 눈들에 고개 들어올리기가 점차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손등으로 문지르며 눈물을 닦는 이원준에게 장소도 피할 겸해서 동정의 권유를 했다.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 닭강정 먹으러 가거든? 그만 울고, 먹으러 같이 가자. 내가 살게.”
갑작스러우면서 어색하게 건넨 권유에 눈 주위가 눈물범벅이 된 그가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학교에서는 우리 셋을 압도당하게 한 사나운 곰이 크기가 큰 곰돌이 인형으로 바뀐 기분을 들게 했다. 겉모습은 눈속임이었던 것이다. 애들도 불만은 없으나 미안함을 돈으로 해결하려한 이영준의 몫에 대해 자신들에게도 사주는 은총을 내려주는지 묻자, 입모양으로 ‘닥쳐’라고 뻐끔거렸다.
시계 바늘이 15분쯤 지나갈 동안 앞에 일어날 일들을 가볍게 생각한 나에게 진땀을 뺄 일들로 가득하게 했다. 후회할 거라고 누가 말해줬음 좋았을 터인데 말이다. 그러다 저 둘을 보고나자 이 생각은 금방 접어 버렸다. '누가'들은 그럴 생각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눈물의 판단이었다.
이제야 겨우 먹으러 가는 중임에도 벌써 정신뿐만 아니라 닭강정을 맛있게 먹을 예정이던 입도 지쳐버렸다. 정말 기 빨린다. 그래서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아 더욱 소중한 오늘 하루를 조용히 나대지 않고 지내겠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진심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후회의 다짐하였다.
***
“가만히 닭강정을 먹으면서 들었지. 이영준의 애달픈 러브스토리를!”
기억 속 추억 회상용 보고를 마무리하면서 수빈은 만화 속 악당처럼 씨익 웃었다. 웃음에 생각은 드러났지만 그림쟁이 아니랄까봐 표정 묘사와 연출은 지가 그린 그림처럼 기가 막혔다.
“닭강정에 눈물을 묻혀가며 먹던데. 비 맞은 강아지처럼.”
이영준의 당시 감정이 보이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가게 아저씨가 어깨 토닥이시면서 힘내라고 콜라 하나 서비스로 주셨잖아.”
영준에게는 미안했지만 ‘힘내라!’라고 그 당시 아저씨의 말투까지 따라하는 수빈에게 웃음이 터져 서로 깔깔거렸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친구끼리 학창시절 이야기를 곱씹을 때마다 재미는 줄어 들기는 커녕 항상 배가 되었다. 이제 우리도 유행어를 알고 따라하던 신세대에서 벗어나 10대를 그리워하는 옛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 대화같이 돼지기름으로 지글거리는 불판 위에는 지방층이 적절한 핑크빛 고기가 새롭게 뜨거운 온도에 육신을 지지며 올라갔다.
닭강정 러브스토리의 얘기를 조금 더 이어가려던 중, 입구가 보이는 방향으로 앉아있는 자리에서 방금 말리고 온 듯한 머리에 편안한 복장을 한 멀대 같이 크디큰 남자가 눈에 띄었다. 나타났다, 통화의 주인공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옛 속담은 몇 세기를 거친 현대에도 유효했다. 고개를 올려 우리를 찾는 그가 보이도록 손을 올리자 많은 인파들 사이를 뚫고서 내 옆자리로 착석했다. 그가 앉을 때 쿵하며 앉아서 그런지 조금 움찔했다.
“울었을 줄 알았더니 아니네? 옛날에 비하면 많이 강해졌다?”
“언제까지 너한테 난 찔찔이냐?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다.”
27년을 살아 온 이 나이까지 순정을 간직한 남자에게 이번에도 또 속아주기로 했다. 그런데, 얘 얼굴을 봤더니 아까 얘기하던 눈은 팅팅 붓고 눈물범벅이던 열일곱 이영준의 얼굴이 떠올라 당사자 앞에서 곧 웃을 얼굴을 감추고 가면을 쓰기란 쉽지 않았다. 곧 펑하고 터질 얼굴을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이상해하며 보던 그가 손가락을 가리켰다.
“너희 무슨 얘길 했으면 얘 얼굴이 이러냐?”
“글쎄, 예를 들면. 우리 호구의 찐한 순애보?”
놀림조의 순애보라는 말이 그의 얼굴을 백설공주가 마녀에게 받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만들었다. 지고지순한 로맨틱의 뜻을 가진 단어 하나의 파급력은 상당히 컸다.
“아씨, 야! 그만 우려먹을 때도 됐잖아! 언제까지 들먹댈건데?”
“우리 헤어졌어요~ 옆에서 같이 울어줘요~ 사랑에 속은 내가 미워~”
순애보로 쏘아 올려 시작된 소현의 놀림이 수빈이 윤하의 <우리 헤어졌어요>를 영준의 연애사를 음정이 높아서 못 올라가는 삑사리에 빗대어 열창하였다. 참 이럴 때만큼은 손발이 척척 맞아 떨어졌다. 무서운 년들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과학에는 박학다식한 이과 애들이 아직도 발명을 못한 타임머신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네 명의 열일곱살 때의 모습이 지금과 겹쳐보였다.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묘함이었다.
잘 구워진 고기를 마다하고 셋의 치열한 혈투를 지켜보면서 우리에게 바뀌거나 달라진 것은 늘어난 숫자로 정의하는 나이와 그에 맞추어야만 하는 외견뿐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스쳐갔다. 진짜 우리는 성장판과 멈춘 몸뚱이 빼고는 부모님이 항상 강조하시던 성숙이랑은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다. 아직도 지방은 옆으로 잘만 자라던데 주름진 정신연령은 그대로였다. 그런 우리의 성숙도와 다르게 먹기 좋게 잘 익은 고기는 결국 셋을 구경하던 내가 집게 되었다.
고기를 몇 점 남겨두고서 한국인이라면 안 먹으면 허전해 꼭 필수적으로 거쳐야하는 볶음밥을 주문하자 점원분이 불판 위에 밥과 갖가지 속재료를 얹고 볶기 편하도록 깍아 개조한 나무주걱으로 정성껏 볶아주셨다. 내가 집에서 요리로 만든 것과는 다르게 불판 위 볶음밥은 계란프라이 모자를 쓰고서 참기름의 고운 윤기를 자랑했다. 피가 튀기게 말로 다투면서 고기를 먹은 셋도 볶음밥 앞에서는 예의를 차린 듯이 입맛을 다시는 소리 말고는 묵음이었다.
“바닥에 누룽지 생기게 좀 더 기다...”
맛있는 묵음을 깨기 위해 숟가락으로 볶음밥 밑바닥을 들어 올려서 불판에 눌러 붙은 누룽지가 생겼는지 확인해 보려는데, 가게 입구 쪽에서 회식을 하러 온 것으로 짐작되는 정장을 갖춰 입은 남녀들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무리 중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피해야 했지만 마주친 눈은 서로를 피하지 않았다. 못했다고 하는 게 훨씬 더 맞을 것이다.
고기를 굽는 소리와 웅성거림 속에서 들리는 눈이 마주친 남자의 음성이 잘 들려서 탈이었다. 아득하다고 하지만 그저 자물쇠로 걸어 잠가서 잊혀졌다며 멋대로 방치한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익숙하면서도 또한 낯설었다. 아는 이들이 떠들며 앉아있는 이 자리를 당장 벗어나고 싶을만큼.
“미안한데, 나 잠깐 바깥바람 좀 쐬고 올게. 니들 먼저 먹어.”
신고 있는 구두의 굽에서 급한 걸음과 함께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마치 지금 내 심정처럼. 단지 일정한 또각또각 소리와는 달리 내 안에선 불규칙했다는 점이다. 밖으로 나오자 한순간 옥죄고 있었던 부분들이 서서히 풀어졌다. 다시 만나면 못 알아본다고 자신했던 과거의 나는 현실에게 굉장히 오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입는 옷, 나이와 같은 외견이 그렇게나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마주친 짧은 찰나에 알아차려버렸다. 나를 위해서라도 몰랐어야 했는데, 그 남자가 누구인지를 말이다. 내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삼겹살집 앞에 둔 의자에 앉아서 만끽하고픈 살랑거리는 봄바람으로 다방면으로 놀란 기분을 천천히 한결 나아질 수 있도록 진정시킬 수 있었다.
“신은지.”
눈을 감고 온몸으로 봄바람을 느끼고 있던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서 있었다. 그럼에도 눈 한 쪽 뜨지 않았다. 그냥 집으로 홀연히 이대로 가 버릴까하는 생각만 연신 들고 있었다.
“왜 그렇게 불러. 부르지 마.”
이미 알고있다는 듯 이름을 부른 목소리를 모르는 척 하지 않았다. 그렇게 툭 꺼낸 말투에는 27살의 빨간 경고를 담았다.
"이름 불렀어.”
목소리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애써 무시한 채로 머리만 유리벽에 대고 고개만 기대 돌린 채 눈을 떴다. 아까 전 눈이 마주친 그 남자가 지금 두 걸음 거리로 내 눈앞에 서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두면 편할 일을 그 날로부터 10살이 늘어난 나에게 굳이 말을 걸어온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금은 그랬다.
어딘가 쾨쾨한 먼지를 뒤집어쓴 감정의 기류가 흐르는 잠깐의 상황이 나에게 너무나 불편했다. 봄바람도 폐가 숨쉬기에는 좋을 정도로 쐬었겠다. 앉아서 감정정리를 도와준 의자에서 일어나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눈길은 앞이 아닌 아래만 쳐다보면서 다시 애들이 있는 테이블로 돌아가려는 내 앞에 묵묵히 있던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 때문에 바닥에 닿아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다리에 힘을 주어도 더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대로네.”
자신을 지나쳐서 멈춰선 나를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은 그가 나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도대체 뭐가?”
흔히 드라마에서 보면 오랜만과 같은 클리셰적인 말이었다. 대답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택도 없는 일말의 기대라도 했었는지 무의식적으로 잠시 뜸을 들이다가 딱 나지막이 한 마디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구두굽의 불규칙한 또각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본래 있어야했던 자리로 돌아가서 앉자 볶음밥은 이미 셋의 뱃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식어버린 불판이 고요히 고자질했다. 하지만 고자질은 한 걸음씩 점점 빨라지는 또각거림에 묻히고 말았다.
계산은 내 카드가 하고 식당의자에 둔 짐을 챙겨 부랴부랴 밖으로 나왔다. 오늘 저녁, 유일하게 취한 사람은 수빈 혼자였다. 펼쳐진 광경 속에서 최고의 진상이었다. 인간의 경계를 벗어난 그녀를 양쪽에서 부축하는 소현과 영준은 어깨에 짊어진 무게를 힘들어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금으로 푹 절여진 배추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수빈이 오늘은 조금 부러웠다. 오늘은 취해도 된다는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을 귀담아 들어도 됐었을 날이었다고, 기분이 좁은 공간 안으로 이미 구겨진 자국이 남을 정도로 구겨진 것을 속으로 더 구겨 넣으며 말했다.
하루의 끝자락에서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을 전혀 몰랐다. 아니, 다시 만날 일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것도 17살의 신은지란 소녀의 풋풋하고 모든 ‘처음’을 알고 있는 정연호란, 비워진 빈칸 속의 재회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