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유령(海遊嶺)

by diletantism

한성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날, 어명이 내려왔다.


“각 영의 장수는 각기 병력을 수습하여 임진강 이북에서 적을 막을 것이며, 대군과 반드시 합류할지니, 독단으로 흩어지지 말라.”


붉은 인이 찍힌 종이는 여러 손을 거쳐 북쪽으로 흘러왔다. 그러나 종이보다 먼저 전해진 것은 소문이었고, 소문보다 앞선 것은 패전이었다.

임금은 도성을 떠났고, 남은 것은 어지러운 기별뿐이었다.

신각이 그 어명을 받아 든 것은, 이미 한강이 끊어진 뒤였다.

그는 한참 동안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합류하라’는 두 글자가 먹빛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다.


“임금의 말은 아직 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이양원이 낮게 말했다.

신각은 대답하지 않았다. 임진강 쪽 하늘에는 이미 왜군의 연기가 낮게 걸려 있었다. 그 길로 가는 것은 어명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병력을 버리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어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무거웠다.

임진년 여름, 한강 북안의 흙은 이미 사람 냄새를 잃고 있었다.

왜가 능욕한 백성보다 깊은 상처는 나라였다. 사대의 명분 아래, 말하지 못한 원망이 팔도를 아울렀다.

싸움보다 먼저 끊긴 것은 말이었다. 전령은 오지 않았고, 명령은 길 위에서 흩어졌다. 더 이상 어디가 전선이고 어디가 후방인지 알 길이 없었다.

임진강 쪽 하늘은 이미 왜군의 기척으로 잠겨 있었고, 그 길로 향하는 것은 합류가 아니라 포위처럼 느껴졌다.

“임진강 쪽은 이미 막혔을 겁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시원이었다. 말굽에 묻은 진흙이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김 도원수께 합류해야 합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으나, 그 말에는 확신보다 바람이 섞여 있었다.

신각은 대답하지 않은 채,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강 쪽은 붉은 먹으로 이미 여러 차례 덧칠돼 있었다.


“지금 그쪽으로 가면, 합류가 아니라 포위가 됩니다.”


이번엔 이양원이 낮게 말했다.


“왜군 선발대가 이미 위로 올라왔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 울음소리만 낮게 흔들렸다.


“그럼 어디로 물러나겠다는 겁니까.”


누군가가 신각을 바라보며 물었다.

신각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강이 아닌 산 쪽을 가리켰다.


“임진강은 이미 왕에게 닿지 않는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살아남은 군사가 있어야, 다시 싸운다.”

전열이 아니라 틈을 택했다. 동두천을 지나 연천 쪽으로, 가장 덜 붉은 길을 골라 물러났다.

해유령의 숲은 깊었다.

산의 등줄기를 따라 왜군의 선발대가 지나간다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 신각은 더 묻지 않았다. 이양원, 이시원과 합세한 병력은 더 적었지만, 지형은 그들의 편이었다.


“지나칠 때까지 기다린다. 칼은 소리 내지 말고.”


숲은 숨을 죽였다.

왜군 70명. 가토 기요마사의 선발대였다. 그들이 계곡에 발을 들이는 순간, 신각의 손이 내려왔다. 창이 먼저 번쩍였고, 화살이 이어졌다. 비명이 채 나오기도 전에 왜놈들은 무너졌다.

사람은 넘어졌고, 말은 쓰러졌으며, 계곡물은 차례로 붉어졌다.


그날, 해유령은 이름을 얻었다.


그날 밤, 병사들은 울었다.


살아서 이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신각은 전과를 정리하며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계를 올려야 했다. 그러나 전령은 이미 흩어졌고, 어디로 보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미 무너졌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하루를 미뤘고,

그 하루는 그의 목숨이 되었다.


양주로 향하는 길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후퇴는 계속되었고, 연락은 끝내 닿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그를 부르러 온 것은 왜가 아니라 조정의 군졸들이었다.


“부원수 신각, 적전 도주 혐의로 체포한다.”


그는 그 말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변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조정은 이미 지쳐 있었다. 신립이 죽고, 한강이 무너지고, 장수들이 줄줄이 패했다. 이제는 누군가의 목을 통해 본보기를 세워야 할 때였다.


신각은 그 자리에 가장 알맞은 이름이었다.


참형장에는 바람이 셌다.


그는 자신의 패장을 만졌다. 해유령에서 묻은 피는 이미 마르고 없었지만, 손끝에는 아직 감각이 남아 있었다.

칼이 들렸다.


하늘은 이상하리만치 맑았고, 바람은 강 쪽에서 불어왔다. 그가 끝내 닿지 못했던 강의 방향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닿지 않을 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칼이 내려왔다.

목이 땅에 닿자, 글이 왔다.


‘부원수 신각, 삼가 아룁니다. 적은 이미 한강을 건너 북상하였고, 임진강 방면은 선발대가 먼저 들이닥쳐 합류가 어려운 형세이옵니다. 신은 병력을 보전하여 동두천·연천 방면으로 후퇴하였고, 해유령에서 적 선발대 칠십 명을 격파하였습니다. 병력의 손실은 경미하오나, 전령이 흩어져 상세한 보고를 제때 올리지 못함을 통탄하옵니다. 신은 아직 싸울 수 있으며, 살아 있는 병력으로 다시 적을 막고자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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