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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Sep 04. 2024

간병일기 73

버스 정류장

버스 정류장


남편은 어젯밤에도 잠을 못 이루더니 아침 9시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잠자는 환자 얼굴을 조금 들여다보고는 간병인 아줌마랑 좁은 간이 침대에 앉아있기도 뭐해 집에서 가져온 신문을 들고 휴게실로 나왔다. 뇌압을 낮추는 주사액을 10시까지만 맞추고 잠그라고 확인시키고 나왔는데 11시에 병실로 들어가니 그걸 잠그지 않아 병이 비어있다. 아줌마는 그것도 모르고 남편 옆 침대의 보호자가 일주일 쉰다고 부른 간병인 아줌마와 서로 아는 사이인지, 간병비며 전에 본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두 사람의 말을 자르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다행이도 내가 병실에 들어서자 대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잠을 자지 못한 차에 약물까지 과다 투여가 됐으니 몸이 견뎌 낼 수 있을까. 사람이 둘씩이나 있으면서 주사액 조절 하나 못하다니, 서로를 믿은 게 탓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발견을 하여 그렇지 이런 일이 이번뿐일까. 의심이 의심을 나면서 간병인 아줌마를 달리 생각하게 됐다.


집에 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교 시간이라 고등학교 아이들 무리가 정류장으로 몰려왔다. 남학생들은 혼자 또는 두셋 정도 무리를 지어 나타났는데 여자아이들은 그보다 많은 수가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무슨 할 말들이 그리 많은지 왁자지껄한 게 시장바닥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생기가 넘쳐나는 소란스러움은 소음이 아니라 새들이 지저귀는 것마냥 귀를 청량하게 했다.


그들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저런 한때가 있었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때 나름 삶의 무게에 허덕이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죽어가는 남편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다. 책임을 지고 키워야할 아이들도 없었다. 딱히 뭘 의도한 바 없이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던 때, 스스로를 죄수라고 여기며 시간들을 무의미하게 흘러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 역시 저 아이들처럼 종알종알 내용 없는 말들을 지껄이며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고, 지금의 나처럼 어른인 누군가는 그때의 내 모습에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도 있었으리라. 지금은 비록 세상을 다 살아버린 늙은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저 아이들처럼 수다떨며 지껄이는 것만으로 주변을 환하게 만든 존재였을 거라고 믿고 싶다. 버스 한 대가 지나가자 학생들이 정류장에 불어넣은 활기가 사라졌다. 정류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들의 기다림만이 버스바라기가 돼 인내하고 있었다.(2011년 4월 1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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