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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

by 인상파

빈자리


사할린 동포 할아버지가 3일 전 병실로 들어왔는데, 오늘 세상을 떴다. 점심을 간병인의 도움으로 잘 드시는 모습까지 봤는데 낮잠을 주무시다가 그렇게 가셨다. 삶이 참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도 조용히, 그렇게도 쉽게 떠나실 수 있는가. 아침에도 이것저것 챙기는 정정한 모습을 보여서, 그렇게 가시리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런 신호도 없이, 예고도 없이, 그렇게 무심하게 떠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동안 내가 본 죽음은 하나같이 절절한 고통 속에서 오랜 시간을 끌다가야 닿는 것이었기에, 할아버지의 죽음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가족도 없이 홀로 있던 그분이 떠나자, 간병인으로 일한 지 5년이 넘었다는 60대 후반의 간병인 아줌마가 한숨을 쉬었다. “돌보기 편한 환자가 일찍 가버렸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녀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곧 다른 병실로 옮겨가 새 환자를 돌보게 되었다. 병실의 빈자리는 그렇게 곧 채워진다.


자꾸 병실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남편도 언젠가는 그렇게 가겠지. 남편의 침대가 비워지고, 그 빈자리에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오겠지. 침대 위에 누운 사람은 장례식장의 냉동고로 옮겨지고 조문 행렬이 이어질 것이다. 지금 이렇게 내 앞에서 숨 쉬고 있는 사람이 언젠가 관에 넣어진 채 화장터로 들어가면, 다시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되겠지. 그렇게 한 생이 졸(卒)하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나는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는 자꾸 그날을 상상하지만, 여전히 ‘아직은 아니다’라는 마음으로 부인하고 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빈자리가 남편의 몫이 되는 순간, 그 자리에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우리 함께한 시간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다. 그 그림자는 차갑게 식어가겠지만, 그 속에 남편의 숨결과 나의 손길이 여전히 잔열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빈자리는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누군가의 삶이 다녀간 자리, 사랑과 돌봄이 깃든 흔적, 그리고 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시간의 무게다. 나는 지금 그 무게를 미리 목격하며, 두려움과 슬픔과 부정이 뒤엉킨 마음으로 앉아 있다. 언젠가 그 빈자리가 내게도 닥칠 것을 알면서도, 오늘은 그저 이 자리에서 남편의 손을 잡고 있다. 그것만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다.

(당신이 떠나기 전 4월 중순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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