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살 겨울 어느 날
스물한살 겨울 어느 날
대학을 들어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인생이 달라질 줄 알았다. 뭔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남루하고 진부했다. 자유를 얻었으나 전혀 자유롭지가 않았다. 동기들과의 이물감은 컸지만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몰려다니며 시간을 때웠다. 의욕도 없이 눈먼 시간들을 흘러 보냈다.
사람을 얻는 것은 어디에서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시절에도 그랬다. 사람들이 모두 내 맘 같지 않아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들어 자주 외로웠다. 나만 외톨이로 남겨진 것 같은 세상에, 오로지 나의 뇌리를 떠도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 도저한 깊이에 빠져 허덕이고 죽음의 터널에 갇혀 절망하고 탄식하며 무위한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며 눈물 지었다. 젊은 목숨이 안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친 겨울바람은 영혼을 헤집고 울부짖었다. 양 끝에서 팽팽하게 끌어당기는 죽음의 밧줄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썼다.
대학 강의도 시원찮았다. 겨우 이런 걸 배우러 대학에 왔나 싶을 정도로 시시해졌다. 너무 빨리 포기해버리고 너무 성급하게 기대감을 접어버린 탓에 너무 일찍 늙어버렸다. 수심은 깊어가고 인상을 쓴 탓인지 이마의 주름은 늘어갔다. 시답지 않은 지식 나부랭이와 죽은 자가 남긴 지식을 긁어모으며 시험을 몇 번 치르고 나니 1학년이 끝나 있었다.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고향집에 내려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깊은 산속 무덤 앞에 섰다. 집성촌이라 한 집 건너면 모두 멀고 가까운 친척이라 그 무덤의 주인은 나의 뿌리이기도 할 것이기에 재배하고 오래 묵념을 했다. 흙더미가 무너져내린 다 쓰러져가는 봉분을 친구삼아 오래고 오랜 곰팡내 풍기는 옛이야기를 걸었다. 겨울의 따사로운 볕조차 비껴가는 그 음침한 곳에서 하 세월 모르고 기다림을 기다리고 있을 사자는 말동무가 그리웠다는 듯 첩첩이 쌓인 썩은 나뭇잎 냄새를 구수하게 피워올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 또한 무덤 속 백골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누워 있을 것을 상상하면 조금은 서럽고 조금은 위로가 되기도 했다.
한때는 120 가구가 넘게 살았던 마을이었는데 하나 둘 도시로 떠나 산을 개간한 논밭이 그때부터 놀아나고 있었다. 농사 지을 땅이 없어 맨손으로 개간하며 흘렸을 땀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왔다. 식구들과 옹기종기 나눴을 다정한 이야기들이 산과 들판에 흩어져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오래된 무덤 앞에서 아무에게도 기억되고 싶지 않아서 과거의 과거를 붙잡고 시간을 역행하는 일은 슬프고도 고독한 일이었다.
산자락에 싸인 마을을 빠져 나오면 바다에 가 닿을 수 있었다. 그 바닷가 산마루에 올라 목적지가 분명한 지나가는 배를 지켜보노라면 느닷없이 배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었다. 물고기가 되지 못해 떠돌지 못한 신세가 처량해질 무렵이면 추울 것도 없는 겨울 오후의 나른한 볕을 쬐며 덤불에서 깊이 침묵하고 앉았노라면 바닷가에 떠도는 수천 년의 속삭임이 귀를 어지럽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 꼬마들 여럿이 바다로 헤엄을 치러갔다. 둘째 언니를 따라 바다 깊숙이 들어가다가 뱃구멍에 빠져 죽을 뻔했다. 바다에 농막을 치고 멸치를 잡던 동네 아저씨가 나를 구했을 때는 숨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 아저씨는 어린 내 두 다리를 잡고 머리 위로 뱅글뱅글 돌렸다. 그러자 먹었던 바닷물을 토해내며 내가 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 이후 앞을 향해 쭉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언제나 유년의 그 기억에 사로잡혀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 죽음의 구덩이에서 서성이며 어린 영혼을 업고 다니는 내가 보였다.
바다는 어디에서 시작돼 어디에서 끝이 나는가. 끝없는 바다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바다만큼 막막해 온다. 마음이 망망대해에서 오가지 못한다.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바다에서 와서 허공으로 가는가. 생명의 시종을 알아 무엇한다고 그것을 알지 못하면 인생이 멈춰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가. 그리 심각할 것도 없는 삶에 물음표를 던지며 살고 있는가.
죽음을 향한 몸부림이 삶이라고 단언하며 무모하게 대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왜 사는가? 의도하지 않았던 탄생, 허망한 육신이 허망한 바람을 부르고, 육신보다 마음이 삶의 허망함을 낙인찍는 의욕상실의 날들이었다. 갈팡질팡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도 헛헛한 웃음만이 삐죽삐죽 새어나왔다.
사막같은 마음밭에 뿌리내리지 못할 운명이라도 되듯 그 해 겨울 내내 떠돌았다. 산으로 바다로 떠돌았던 그 해의 겨울은 참으로 가슴 시리게 쓸쓸했다. 나와 다른 시대를 살았을 사람의 무덤 앞에서 내 몸속에 흐르는 조상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된 핏줄을 생각하며 나는 아낌없이 무릎을 꿇고 왜 사는가? 왜 죽는가를 묻고 또 물었지만 끝내 답을 얻지 못했다. 무덤 속 백골처럼 나 역시 그렇게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아득한 확신을 갖고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