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개새끼
엄마의 개새끼
볕이 따사롭고 마음이 평화로운 날이다. 어머니를 센터에 보내고 났더니 아들이 일어나서 아침을 찾는다. 당장에 내놓을 수 있는 메뉴에 고구마무스, 떡국, 샌드위치가 있었는데 어제 먹었던 샌드위치가 생각났는지 샌드위치를 고른다. 요즘은 집안일에 많이 게을러졌다. 어제 저녁 설거지를 해치우지 않았더니 개수대에는 설거지거리가 쌓였다. 어젯밤 11시 넘어 쓰레기 집하장에 쓰레기를 버리고 나서 설거지를 했어야 했는데 손에 물 묻히기가 싫어 그대로 뒀더니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아졌다. 어차피 쌓일 설거지 아들이 아침을 해결한 다음 처리할 심사로 우선 샌드위치부터 만들었다. 식빵 사이에 계란과 베이컨, 치즈, 양상추를 넣고 샐러드 소스를 뿌렸다. 빵 한쪽에는 딸기잼을 발라 2개의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아침에는 식욕이 별로 없는 아이가 맛있다며 엄마의 기분을 우쭐하게 한다. 양이 많았던지 다는 못 먹고 절반을 남겼다. 음식을 즐겨 하는 편인 나는 식구들이 차려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때면 기분이 좋다. 좋은 성적을 받아든 느낌이다.
요즘 아들과 좀 말랑한 편이다. 새해 들어 아들과 대판 싸웠던 적이 있다. 싸워서 정이 들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저 가벼운 해프닝으로 돌리고 예전의 모습을 찾아서일 것이다. 어떤 이는 사람의 부류를 빚을 지는 자와 빚을 지지 않는 자로 나눈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을 개새끼와 개새끼가 아닌 자로 나누는 버릇이 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지만 내 나름 사람의 유형을 분류하는 방법이다. 그건 내가 개새끼가 되지 않으려는 내 나름의 고육지책이다.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의 표현이다.
카톡 프로필에 개새끼라고 적어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때 기분이 개같았고 그래서 적어뒀는데 지운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들 녀석이 내 핸드폰의 카톡을 훑어보다가 그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아이의 반응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그토록 심각하게 나올지 몰랐다. 엄마가 기분이 별로여서 그랬나 보다 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문제로 보았다. 그 말을 보고 엄마의 품위가 저질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게 속상했다면 이해한다. 아이는 엄마의 개새끼 정체가 몹시 궁금했는지 그걸 확인하려 들었다. 아이의 묻는 말에 나는 굳이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내 핸드폰은 아들과 딸에게 개방적이다. 숨길 것도 없고 녀석들이 봐도 별 무리 없는 그런 정보로 채워져 있기에 그렇다. 그런 엄마가 핸드폰에 누군가에게 개새끼라고 적어놓고 그걸 감추려 드니 비밀이 생긴 엄마가 미심쩍었고 그걸 해소하고 싶었던 걸까. 설마 저를 개새끼라고 해 놓았다고 생각한 걸까. 그럴 리는 없었다. 카톡 상단의 딸 아래 아들이라는 제 프로필이 있었으니까. 그럼, 뭐가 문제였을까. 엄마에게 개새끼가 있을 수도 있는 거지. 녀석은 엄마가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않는 게 수상했던 걸까. 엄마의 핸드폰을 기어이 확인해야겠는지 제 방에서 나가려는 엄마를 못 나가게 붙잡았다. 그래도 엄마가 불지 않으니까 극약처방을 한다.
순식간이었다. 문짝에다 제 머리를 쿵쿵 박고 주먹으로 쾅쾅 처댔다. 말리면 말릴수록 강도가 더 해졌다. 머리는 괜찮았지만 주먹 쥔 손에서는 피가 보였다. 순간 아이가 미쳐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자신의 카톡 누군가에게 개새끼라고 했기로서니 그게 저를 그토록 미치게 하는 짓인가. 아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졌고 무서워졌다. 그래도 나는 개새끼를 밝힐 생각이 없었다. 그건 엄마의 프라이버시다. 아이가 그런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뭣 때문에 그리 날뛰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녀석은 나를 완력으로 밀어붙였고 나는 녀석의 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이의 씩씩거리는 소리만 사위를 가득 채웠다. 에라 모르겠다, 아들의 침대에 누워 창 쪽으로 돌아누워 잠자는 척했다. 녀석이 엄마 자라고 불을 끄고 거실로 나간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녀석이 엄마 곁으로 와 눕더니 엄마 일 엄마가 알아서 하란다. 자기는 이제 엄마 일 상관하지 않을 거란다. 개새끼 정체를 불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는 투였다. 녀석은 자주 세상일에 어두운 엄마를 걱정하며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왔다. 그래서 엄마의 개새끼한테서 지켜주려는 심사였을까.
생각해 보니 그때의 일은 모자의 신뢰가 깨지는 그런 문제였다. 모든 걸 개방했다가 뭔가를 감추려 들었으니 말이다. 녀석으로서는 배신감이 들고 자존심이 상했으리라. 우리는 그 이후 그날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날의 일은 아들에게도 충격이었겠지만 나에게도 녀석의 자해가 충격적이었다. 자식 하나 잃어버린 것 같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 심장이 덜덜거리다가도 바람 빠진 풍선마냥 푸하, 하고 웃음이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의 마음, 그 마음을 다스리며 살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릇이 넓지 못한 내가 이만큼이나 살아가고 있는 건 쌓인 화들을 가슴에 가두지 않고 일부는 욕설로 배설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품위가 없어 보이기는 해도 개새끼를 개새끼라고 부르는 것이 뭐 대단한 흉이고 품위가 손상되는 일일까. 개새끼들이 많은 세상에서 개새끼가 되지 않으려고 나는 개새끼와 개새끼가 아닌 자를 구분하려 할 뿐이다.(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