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를 기리며
뭉크를 기리며
우리 집에 뭉크가 온 첫날이 생생하다. 인터넷 고양이 카페를 통해 데리고 왔다. 2018년 3월 16일이었다. 딸의 19번째 생일을 앞두고 데리고 온 아이였다. 먹물보다 시커멓고 짧은 꼬리의 앙증맞은 발을 가진 소담한 몸피의 아이였다. 뭉크가 머물고 있던 곳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데려올 일이 난감했는데 카페 담당자가 손수 데려다주겠노라고 하여 우리는 고양이 변기와 사료통, 그리고 잠자리를(그것은 철조망으로 만든 우리 안에 담요를 깔아 놓은 것) 딸 방에 들여놓고 뭉크를 맞을 준비를 했다. 뭉크라는 이름은 딸이 지은 이름이다. 딸은 노란색 고양이에게는 빈센트를, 검은색 고양이에게는 뭉크라는 이름을 붙일 거라고 미리 선언을 해놓고 있었다. 우리 집에 오기 전의 뭉크는 김말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털색이 김처럼 시커메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뭉크는 길에서 살다가 어느 남자의 집으로 입양을 갔다가 그 남자가 해외로 나가는 바람에 파양을 당한 상태였다. 상처가 있는 아이여서인지 첫인상이 울적해 보이기도 했다.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걸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은 나로서는 뭉크를 데리고 오기 전, 딸과 단단히 약조를 했다. 고양이를 키우게 되면 절대로 딸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할 것. 고양이 털이 집안에 날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고양이 분뇨와 사료 냄새가 집안에 풍기는 건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고양이 양육에 대한 책임 또한 일체 딸이 지기로 했다. 엄마의 반대가 심해서 딸도 제 용돈을 아껴서 고양이 사료와 모래, 병원비 등을 마련하겠노라고 했다.
고양이 분양을 필사적으로 반대했다가 조건을 달며 허락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마음의 병은 얻은 딸아이는 어디에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등교 거부를 하는 날이 다반사여서 출석 일수를 간당간당 채우며 겨우 진급하여 3학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딸은 고양이 카페나 유튜브를 웹 서핑하며 고양이를 자주 물색했는데 어느 날 인터넷 카페에서 마음이 동한 뭉크 사진을 보았고 그 아이를 분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꼭 데리고 오겠다는 맘을 먹게 되었다. 오랫동안 뭉크는 선택받지 못한 상태로 있다가 딸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이후로 딸은 내게 뭉크 사진을 보이며 데려다 키우자며 자주 졸랐다.
아무리 고양이 양육이 비위생적이고 번거롭고 비경제적이라고 해도 절대 NO만을 할 수 없었던 건 반려동물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치유한다는 사실이었다. 더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딸이 고양이에게 저토록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 걸 보면 희망이 보이기도 하여 계속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약간의 기대가 있어서 한 생명을 들이는 걸 허락하고 엄마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라며 고양이에 대한 모든 책무를 딸에게 지웠다. 버림받은 뭉크에게서 딸은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애지중지했고 뭉크 울음의 고저와 장단에 따라 무엇을 원하는지 말귀를 알아듣는 것처럼 통하는 데가 있었다.
뭉크는 낯선 곳에 와서 한 열흘간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련해 준 잠자리를 마다하고 사람이 무서웠는지 책상 서랍 뒤쪽을 발길질하여 공간을 만들어 그곳을 보금자리 삼았다. 방문을 살짝 열고 엿보면 뭉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사료통의 먹이는 줄어들고 있어 굶어 죽지는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닫히다 만 방문을 밀고 거실을 조심스럽게 돌아다니기 시작하더니 안방이며 부엌, 화장실 등 열린 공간이면 어디든 제 영역으로 만들어버렸다. 딸이 학교 가고 없는 낮에는 딸의 방에서 벽을 보고 앉아 자는 폼이 꼭 수도승처럼 여겨져 성스럽기도 했다. 뭉크는 조용하고 겁이 많은 새침데기였다. 그런 아이가 한날은 밤중에 자고 있는 내 품을 파고들었다. 마치 내가 제 에미이기나 한 듯 아무렇지 않게 가슴팍을 파고들며 앞발을 내 팔뚝에 가지런히 가져다 놓고 고릉고릉 잠을 잤다. 이 아이도 엄마 품이 그리웠구나! 그 어린 생명을 뿌리칠 수 없어 팔뚝이 절여온 걸 참으며 그 밤을 보냈다. 그날 이후 뭉크에 대한 내 애정은 깊어 갔고 고양이 양육을 나도 일부 분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뭉크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가 되었다.
뭉크가 오고 난 이후 딸의 심리는 안정감을 찾으며 많은 호전을 보였다. 우울하고 슬플 때는 뭉크를 끌어안고 그 고소한 내에 함뿍 취해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딸에게 뭉크는 심리적 안정제이자 분신이자 가족이자 친구 같은 존재였다. 뭉크가 온 이후 우리 가족은 외출하고 들어서면 뭉크부터 불렀다. 뭉크는 식구들의 발소리를 알아듣고 언제나 현관문에서 우리를 마중했다. 그런 뭉크가 우리 집을 떠난 것은 딸이 결혼하면서 남편 집으로 짐을 완전히 옮겨간 재작년 9월쯤이었다. 딸 집에서도 잘 지내던 뭉크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뭉크 배에서 혹이 발견되었고 데려간 병원에서 유선 종양 진단을 받게 된 것이다. 고양이의 종양은 90퍼센트 이상 악성이어서 수술해도 다시 생기고 수술 중 쇼크사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딸은 수술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집에 데리고 있었다. 유선 종양에도 뭉크는 씩씩하게 잘 견디더니 종양이 갓난아이 주먹만큼 커지는 시점이 되니 화장실 이용에 애를 먹고 딸 품에서 보채는 일도 늘고 하더니 2월 어느 날 아침 딸 품에서 조용히 떠나고 말았다.
뭉크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목구멍이 콱 막혀온 듯 호흡의 곤란을 느꼈다. 주변의 사물들이 시야에서 아득해져갔다. 한 생명이 그렇게 떠났구나. 나는 딸이 걱정스러웠는데 딸은 의외로 의연했다. 아픈 뭉크를 돌보며 뭉크가 떠날 걸 미리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딸은 뭉크를 서구 오류동에 있는 화장터에서 화장을 시키고 메모리얼 스톤으로 다시 데리고 왔다. 딸이 뭉크를 보고 싶어하는 엄마와 동생을 위해 우리 집에 데리고 왔다. 우리 가족은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며 뭉크가 집에 온 첫날부터 기억나는 일들을 얘기하고 핸드폰에 저장돼 있는 뭉크 사진을 서로에게 보이며 추억했다.
딸은 집에서 까만 봉지나 물건을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고 한다. 밤마다 뭉크를 안고 잤는데 이제는 그 고소하고 따뜻한 느낌이 없으니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뭉크는 여기 남아있는 가족들이 잘 지내기를 바랄 터이니 우리는 뭉크를 생각해서라도 슬프지만 잘 지내자고 서로 다짐했다. 내게 고양이의 고적하고 품격 있는 세계를 엿보게 해줬던 뭉크야, 엄마 곁에 잠시 들러줘서 고맙고 고맙다.(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