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하루
바쁜 하루
오늘은 정말 무지하게 바쁜 하루다. 2시간 가까운 거리를 통학하는 아들 녀석이 1교시 수업이 있는 날이라고 하여 늦어도 5시 반에는 일어나기에 나도 그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기상했을 때는 잠이 부족해서인지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돌덩어리를 매다는 것 같았다. 밤중에 어머니가 자꾸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훌쩍이셔서 약을 챙겨드리고 난 후에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어쩌랴, 아침은 든든하게 먹여보내야 하니 준비를 했다. 이른 아침이라 식욕이 없는 녀석에게 눌은밥과 샤인머스켓 열댓 알을 먹고 가라고 식탁에 올렸다. 아침을 대충 먹고 녀석은 7시쯤 오는 광역버스를 타러 집을 나섰다.
녀석이 집을 나서자 주무시고 계신 어머니를 깨웠다. 직장인이나 학생들에게 월요병이 있듯, 센터에 다니시는 어머니도 그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월요일 아침이면 일어나시는 걸 몹시 힘들어하신다. 침대 위로 쭉 뻗은 두 다리를 주물러댔더니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신다. 주무시던 양반을 갑자기 일으켜 세워 걷게 했다가 사고라도 날까봐 미리 준비운동을 시킨 것이다. 전날 일요일이면 집안에만 계시다보니 아무래도 걷는 기회가 부족한 탓일 것이다. 오늘따라 변기통에 앉아 계신 어머니가 중심을 못 잡고 뒤로 젖혀져 변기 벽에 머리를 대고 눕기 일보 직전의 모습을 보이신다. 나뭇가지 같은 두 다리와 시름하며 아랫도리를 갈아입히는 데만 정신을 쏟느라 그 지경에 이른 줄 몰랐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 불편한 자세에도 이렇다한 말씀 없이 겁먹은 얼굴로 변기통 옆에 달린 손잡이에 잔뜩 힘을 주고 용을 쓰고 계실 뿐이었다. 아침부터 무슨 곡예를 하는 것인지, 소리라도 지르시지.
어머니가 가시고 식탁에 앉아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공장이 밀집돼 있는 데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언니다. 언니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알고 보니 칼질을 하다가 손을 다쳐 병원에 꿰매러가는 중이란다. 식당에 사람이 없으니 식당일을 도와달란다. 마시던 커피를 후루룩 들이키고 준비를 하여 식당으로 갔다. 언니는 병원에서 돌아와 있었다. 야채를 썰다가 칼날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왼손잡이인 언니는 오른쪽 검지 가운데를 5바늘 꿰맸다고 한다. 아직 마취가 덜 깨서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쏙쏙 아려온다고 간혹 찡그리는 얼굴을 보였다. 언니는 그 손을 하고도 생미역 줄기를 썰고 개수대에서 그릇들을 헹궈냈다.
나는 식당 테이블을 닦고 설거지를 하면서 다음날 튀길 표고버섯 10킬로 한 박스를 다듬었다. 상자 안의 표고는 색과 모양이 참으로 다양했다. 생육지가 그리 다르지 않을 텐데 어쩌면 그리 다른 형색을 할 수 있을까. 손가락 크기의 작고 앙증맞은 둥근 모양이 있는가 하면 갓이 쫙 펴져 펄럭이는 놈, 거북이 등껍질처럼 쫙쫙 벌어진 놈, 부드러운 갈색 톤이 있는가 하면 붉은 갈색톤, 검은 색에 가까운 것, 갓의 속살이 터져 회색 바탕에 흰빛깔인 것 등등. 사람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가위로 버섯 대를 자르고 먼지를 떨었는데 다듬고 나니 붉은 고무 대야 한가득이었다. 공장 사람들이 하나 둘 식당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이후에는 식판을 닦는 본업에 충실했다. 식당은 저녁이면 4시 반에서 6시까지가 가장 붐비는 시간이다. 6시에 식당에서 나와 1시간이 넘게 걸린 전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센터에는 이미 사정을 말해 놓은 터라 어머니는 7시 10분쯤 오셨다.
센터에서 돌아오신 어머니를 씻기고 약을 챙겨 드렸다. 치매에 감기약까지 10알이 넘는다. 목구멍에 알약이 걸렸는지 캑캑거리신다. 놀라서 등을 두드렸더니 손을 저으며 못하게 말린다. 몸이 굳어서 내 손길이 가는 곳마다 통증으로 고통스러우신가 보다. 어머니를 침대에 눕혀드리고 달궈놓은 전기장판 불을 조절했다.
아이들 수업할 시간이 가까웠다. 이무영의 <제1과 제1장>과 박영준의 <모범경작생>을 읽어오라고 했는데 이무영 작품만 읽어왔다. 작품은 작가 겸 신문 사회부 기자인 수택이가 기자 생활을 접고 식솔을 이끌고 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있는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업으로 하는 이야기다. 시대 상황을 차치하고 아이들은 수택이가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농촌에서 농사짓는 걸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도시에 사는 학생들에게 농부라는 직업은 참으로 생소하기 그지없고 자신의 선택지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자에서 농부로의 전환을 실패한 삶으로 여기고 있었다. 수택이와는 정반대의 견해로 접근했다. 요즘 학생들 중에 장래 희망으로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한 터에, 농부라니! 아이들에게 농부는 너무나 낯선 이야기였다. 뒷이야기를 상상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사고는 명확했다. 농사를 짓는 수택이의 생활은 비극적 결말에 이르고 그나마 행복한 결말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 기자 생활을 할 때 가능했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농촌에서 살았던 건 10대 전반까지이고 그 이후는 쭉 도회지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나는 농촌에 대한 향수를 어느 정도 갖고 있다. 부모 세대처럼 생계를 위해 힘겹게 짓는 농사가 아니라 조금은 여유를 부리며 일 잘하는 사내 하나 만나 농사를 짓고 싶은 마음을 아직 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만날 때면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 짓고 살고 싶다’는 박경리의 <일 잘하는 사내>를 자꾸 읊조리게 된다.(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