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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27

탁구

by 인상파

탁구


대학시절 남편과 사귀고 있을 때였다. 그가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늦게 나타났다. 그는 전날 누군가와 만나기로 했다며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나와 사귀기 전 사귀었던 같은 과 여자 선배였다. 마지막으로 점심이나 하고 헤어지자고 했다고 했다. 그것까지 말릴 재간이 없었고 그걸 간섭한다는 건 선을 넘는 행위 같아서 받아들였다. 기분이야 좋았을 리 없었다. 근데 그 선배를 만난 후 나와 약속 시간이 잡혔는데 1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 당시 둘 다 삐삐도 없었던 때였다. 기다리느라 마음은 조마조마하고 피로감이 몰려왔다. 발길을 돌릴 때쯤 그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여자 쪽에서 탁구를 하자고 하여 거절할 수 없었단다.


탁구, 나는 칠 줄 몰랐다. 그래서 약속 시간에 늦은 그에게 더 화를 냈던 것 같다. 나는 할 수 없는 걸 둘이 즐겼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고약했던 것이다. 그때 탁구를 꼭 배우고 말겠다고 다짐했는지, 절대로 배우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거부감을 가졌는지 잘 모르겠다. 그 당시 흔하게 목격되는 게 탁구장이었다. 다니던 대학 근처며 유원지며 눈에 곧장 띄었다. 탁구장 간판을 지나칠 때면 그는 어릴 때 형들과 탁구를 치곤 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런 그에게 탁구를 배우고 싶다고 했던가? 배워서 같이 치자고 한 기억이 있는 걸 보면 탁구를 내 안에서 몰아내지 못했던 것 같다. 탁구가 꼭 탁구만은 아니었을 것이기에. 하지만 그에게서 탁구를 배울 기회는 오지 않았다. 아니, 탁구를 잊고 지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4년을 더 사귀다가 그와 결혼에 골인하였고 둘째 낳고 집을 옮기면서 우리는 건강을 목적으로 운동을 하기로 했다. 아픈 남편에게 운동이 절실해 보였다. 실내 자전거를 들여놓기로 하면서 운동기구 점에 갔는데 탁구채와 탁구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탁구를 배우기로 했던 옛날 생각이 났다. 반가운 마음에 그 앞에서 만지며 구경하고 있으니 남편이 그것도 구입하자고 하였다. 집 근처에 탁구장이 없다고 했더니 남편은 아쉬운 대로 교자상 2개를 펼쳐놓고 치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던 건 암 수술 후 사후 관리를 하고 있던 남편의 몸에 자꾸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탁구채와 탁구공은 우리 집 신발장 서랍에서 오랫동안 잠을 자게 되었다.


최근 단지 내에 성인 독서모임이 꾸려졌다. 단지 내의 작은 도서관에 작년부터 순환 사서 선생님이 일주일에 2번 근무를 하게 되었다는데 그분이 도서관 활성화를 위해 이번에 독서모임을 꾸린 것이다. 친정어머니를 모시기 전에 가졌던 독서모임을 그만 둔 게 아쉬움이 많았던 터라 단지 내에 독서 모임이 꾸려진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서 얼른 가입했다. 독서를 즐기는 사람과 즐기고 싶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첫 만남에 자기소개의 시간을 가졌는데 탁구를 친다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탁구라니! 내 인생에 살짝 발을 들여놨던 그것이 아닌가. 이제는 진짜로 배우게 되려는 모양일까. 일순간 기회를 잡아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때를 놓치면 탁구는 영영 내게서 물 건너 갈 것이다. 나는 그분에게 탁구를 배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분은 가르칠 만한 실력이 안 된다며, 자기도 배우는 중이라며 부담스러워했다. 근데 나뿐만 아니라 다른 분도 탁구에 관심을 드러냈다. 배우고자 하는 두 사람이 자꾸 부추기니 그분은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밤 9시 넘어 시간이 가능하다며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시일이 꽤 지나야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이틀이 지나자 연락이 왔다. 말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개인용 탁구채가 있는 게 좋을 거라는 말에 나는 신발장 서랍에 고이 잠들고 있는 탁구채를 꺼냈다. 남편과 함께 구입했던 20년 넘은 탁구채를. 사용하지는 않아도 벗겨지고 바래고 하여 세월을 먹은 흔적이 역력했다. 한 분은 사정이 있다고 하여 오지 못해 나와 가르치는 선생님 둘이 단지 내에 있는 탁구장에서 만났다. 탁구채 잡는 법부터 물으며 탁구대에서 공을 치고 넘겼다. 거리를 가늠하고 손힘을 조절한다고 조절하였지만 잘 되지 않아 공이 바닥으로 구르기만을 반복했다. 핑 퐁 핑 퐁 떼구루루 바닥에 떨어지며 나는 경쾌한 탁구공의 울림이 탁구장을 가득 메웠다. 흠, 시작은 기어가지만 언젠가는 저 코트를 오가는 공이 날아다닐 때가 있을 것이다. 1시간 정도를 치다보니 탁구대에서 노는 공의 시간이 늘어갔다.


처음 시작한 것치고 이 정도면 대만족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탁구를 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이래로 탁구대에 서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렸구나. 세상일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마음에 둔 바를 실행하기까지는 이렇게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구나. 그래도 그나마 생각에 그치지 않고 내 삶의 그물에 걸려들었으니 다행 아닌가. 살면서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들이 의외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것들인 경우가 많다. 스스로에게 금기의 굴레를 씌우지 않고 주어진 여건에서 기회를 잡고 열성적으로 밀고 나간다면 바라는 바를 못 이루는 것보다 이루는 것이 많아질 것이다.(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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