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앓고서
봄을 앓고서
봄을 앓고 있다. 봄을 앓을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봄을 앓는다고 표현한다. 마른 나뭇가지에 움이 트고 꽃봉오리를 올린 지 오래, 아니 만개한 꽃이 지고 있다. 세상도 뒤숭숭하고 화마가 산과 마을을 휩쓸고 갔다. 우울한 세상에서 우울한 외투를 뒤집어쓰고 두문불출이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지나가고 있는 봄을 지켜보면서 마음의 봄은 맞이하지 못했다.
해마다 봄이면 딸은 앓는다. 딸아이의 병은 계절을 타는 것일까. 우울과 망상이 깊이 모를 심해로 접어들어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다. 시시각각 변하는 딸아이의 감정 톤에 내 감정도 물들어 지상과 지옥을 오간다. 왜 이다지도 살아내기가 힘든 거냐고, 되물으면서 깊고 깊은 우물에 빠져 한 줄기 빛을 향해 기어오르려고 애쓰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람의 힘으로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 나는 이토록 가치 없는 삶에 허덕이고, 허망한 인생에 자맥질하고 있는 것이냐. 끊고 싶은 기억을 끊을 수 없어, 가장 기억하기 끔찍한 일들에 사로잡혀 자학하며 포악스러워지는 자신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아이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넣고 있다는 자괴감으로 오늘도 괴롭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거냐고, 제 집에 있으니 밥도 먹지 못하고 종일 침대에 널브러져 있을 아이를 그려보고서 또 한 번 가슴을 친다. 정작 힘든 사람은 아이인데 그런 아이의 마음을 다독이지 못하고 왜 그런 뒤틀린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가냐고 캐물었던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왜 똑같은 일에 똑같은 실수를 연발하는가. 나이를 먹어가도 달라진 게 없는 내 모습에 화가 난다. 한 템포 늦게 반응해도 되지 않았는가. 괴로워하는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수 있지 않았는가. 내게 주어진 그릇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나는 너무 버거운 것이 아닐까. 여유도 없고 아량도 없고 관용도 없고 오로지 피로한 심신을 이끌고 이 언덕진 세상의 고비를 어찌 어찌 넘어서고 있다. 죽고 싶다는 생각, 죽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슴으로 마음으로 가득하다.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은 먼지처럼 가볍게 어디론지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다는 것 아닌가. 허나 이 거대한 몸으로 먼지처럼 사라지려고 해도 거기에 동반되는 고통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것이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이 세상에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는데 정말, 미련하게 그 시간을 조금 앞당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문제는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한으로 남겨진 시간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는 없어진다는 이 당연한 사실 앞에서 왜 이런 비릿하고 무모한 생각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가. 우울한 모양이다. 우울해서 무기력한 모양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도 쉽지 않다. 뭘 하려는 의지를 잃어버렸다. 오늘 아침 나를 콜한 것은 센터의 요양보호사였다. 어머니가 준비됐으면 지하주차장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내려오라는 거였다. 8시 반이었다. 그 시간까지 나는 잠에서 허덕이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니를 부랴부랴 챙겨 2시간 늦게 출근시켰다. 어머니를 보내고 딸 침대로 들어갔다. 나른하고 곤한 몸, 뭘 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그저 눕고 싶은 것이다. 딴 때는 책이라도 붙잡고 있다가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시도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꽃피는 봄날에. 겨울처럼 춥고 삭막한 마음을 안고서.
누워서도 나는 내게 남은 지상의 시간이 길지 않음을 머릿속으로 헤아린다. 그렇다. 짧은 시간, 무작정 살아갈 수 없다. 이렇게 나태하고 나른하게 살아갈 수 없다. 인내심을 갖고, 내가 원하는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끈기는 보이자. 그것이 내 삶에 대한 예의일 것이니. 무작정 포기하는 심정으로 삶의 끝을 맞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지러운 마음을 우선 추스르고 자고 싶을 때는 눈을 뜨고, 누워있고 싶을 때는 앉아 책을 보고, 앉아 있고 싶을 때는 설거지나 청소를 하면서 서성이자. 적어도 서 있으면 서려는 그 힘으로 뭔가를 시도는 할 테니. 너무 오랜 시간을 보잘것 없이 지냈다. 이제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이다.(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