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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나는 기다립니다

나는 기다립니다

by 인상파

나는 기다립니다, 다비드 칼리 글, 세르주 블로크 그림, 안수연 옮김, 문학동네


나는 기다립니다


나: 나의 기다림은 보슬비 같아서

는: 는개가 내리는 날이면

기: 기린처럼 목을 길게 빼고

다: 다시 태어난 새 마음으로

립: 립밤의 촉촉해진 입술로

니: 니를 만나러 가고 싶은데

다: 다시 못 올 곳으로 떠났으니,


기다림은 끝이 아니라 끈입니다


그림책의 마지막 단어는 ‘끝’이 아니라 ‘끈’입니다. 기다림에는 끝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끊이지 않는 기다림, 그 ‘끈’이 개인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넓게는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붉은 끈으로 기다림을 계속 이어가는 이 책은 가로로 긴 판형을 통해 기다림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끈처럼 형상화하며, 삶을 통시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참으로 독특한 구성을 지닌 그림책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무언가를 기다립니다. 때로는 당연히 올 것을, 때로는 오지 않을 것도 눈먼 희망처럼 기다립니다. 기다린다고 더 빨리 오지도 않고, 기다린다고 반드시 오지도 않지만, 우리는 묵묵히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삶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도 기다림을 숙명처럼 받아들입니다. 아이일 땐 어서 자라 어른이 되길 바라고, 부모가 되어서는 아이가 태어나길, 옹알이하고 걷길, 책을 읽고 학교에 가길, 친구를 사귀고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기다립니다. 사춘기 아이의 침묵이 끝나길 기다리다가, 실은 기다리지도 않았던 일들이 더 자주 우리 삶을 채운다는 걸 뒤늦게 깨닫습니다.


기다리지 않았던 상실과 고통, 예고 없이 들이닥친 그 일들이 결국 나를 키웠다는 것도, 그 아픔이 다시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는 것도 이제는 압니다. 기다림의 끝에서 결국 우리는 끝을 마주하게 되겠지만, 그 끝은 곧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끈이라는 걸 알기에, 그 끈을 붙잡고 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세상과 조용한 작별을 할 수 있는 거겠지요. 작별은 ‘끝’이 아니라, 이어지는 ‘끈’일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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