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과 식당 사이
도서관과 식당 사이
새벽 다섯 시, 핸드폰 벨이 울린다. 둘째 언니였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허리가 아파 출근할 수 없다고 한다. 대신 나와 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 흔한 ‘땜방’이다. 사실 오늘도 어제처럼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쓸 계획이었다. 하루의 계획은 그렇게 어긋났다. 어머니를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센터에 보내야 해서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식당까지는 한 시간 넘게 걸린다. 전철에서 내려 걸어가는 동안, 땀은 옷을 적시고 있었다. 폭염이었다. 에어컨 없는 조리실은 사우나와 다름없었다. 개수대에는 아침을 먹고 간 외국인 노동자들의 식판과 그릇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지난주 내내 도서관에서 피서를 즐겼던 나에게는 다른 세계의 공기였다.
땜방의 일은 정해져 있다. 식당을 빗자루로 쓸고, 마대 걸레로 민다. 식탁을 닦고, 티슈 통에 티슈를 채운다. 식재료를 다듬는다. 점심시간이면 250여 명의 공장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들이 먹고 간 식기를 닦는 것이 나의 주된 일이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식기 세척기에서 나온 수저 바구니에서 수저와 젓가락을 분리하며 정리하다 보면, “이제 거의 다 끝나가고 있구나” 싶은 안도감이 든다. 5시간 내내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는 그 순간. 몸에서 삶이 빠져나가듯 가뿐하다.
도서관과 식당, 이 두 공간 사이에서 기웃거리는 내가 낯설다. 이건 고상과 저속함의 차이가 아니다. 정신과 육신의 분열, 어제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고달픈 육신이 나를 지배할 때,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철학적 질문은 들어설 틈이 없다. 그저 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는 일에 놓여 살아야 하고, 살아져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거기서는 어떤 물음도 감정도 생기지 않는다. 생겨날 틈조차 없다. 닥치는 것이 현실이고, 즉각적으로 몸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일 뿐이다.
상반된 두 세계 속에 놓인 나. 그 사이에서 스스로가 생경하여 뒷걸음질 친다. 책장 사이에서 문장과 호흡을 맞추며 사유를 품었던 어제의 나 옆에는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더위와 구정물을 뒤집어쓴 채 정신을 갈아버린 또 다른 내가 서 있다. 나는 문득 실토한다. 내가 식당에서 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하지만 인생은 늘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 흐름에 놓인 나는 폭염 속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치환되고 있다. 겉보기엔 전혀 다른 두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둘 다 ‘나’다. 도서관의 나에게서는 세상의 고단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정신적 노동도 노동이라지만, 그때의 나는 몸 없이, 머리와 가슴으로 살아간다. 반면 식당의 나에게는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 도서관에서의 읽기와 쓰기가 차가운 생존이라면, 식당에서의 일은 뜨거운 생존이다. 죽고 싶다거나, 울고 싶다는 생각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
몸이 너무 고되면, 마음은 조용해진다. 고민도, 죽음도, 우울도 그저 땀에 씻겨 내려간다. 두 세계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면서 한쪽의 나는 너무 섬세해서 괴롭고, 다른 쪽의 나는 너무 무딜 수 있어서 버텨진다.섬세함과 무딤, 사유와 체험, 글과 노동. 이 모든 것이 번갈아 가며 나를 이루고 있다. 비속한 조화일까, 실속 있는 삶일까.
책만 읽는 나로 살았다면, 너무 쉽게 부서졌을 것이다. 일만 하는 나로 살았다면, 너무 빨리 닳아버렸을 것이다. 도서관과 식당 사이를 오가며 둘로 살면서 조금은 쓰고, 조금은 버티며, 조금은 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