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 뒤에 남은 것
광란 뒤에 남은 것
쏘아대던 물줄기는 멎었고
하늘은 해맑게 웃는다.
타오른 열기가 대지를 덮고
길을 잃은 바람 한 줄기
등줄기의 소금기를 스치고 간다.
바람 속에 저릿한 생선 냄새가 묻어 있다.
집과 길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흙탕물은 거침없이 들이쳤다.
부패한 바람을 대동한 폭염은
때리고, 부수던 빗줄기의 광란을
기억하고 있을까.
자연은 아무 말 없이
어제의 기억은 다 잊으라고
꺾인 풀잎에 추파를 던진다.
광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씻기고, 부수고, 지나가는 건
언제나 자연의 시간이었다.
무를 무화시키고
스스로 무화되는 것
그건 자연의 방식이었다.
모닥불을 다시 피워 올려도
등줄기의 마른 땀처럼
존재의 흔적은 남겠지만
그마저도 이내 사라질 것이다.
뒷걸음질 친 냄새의 기억은
기억을 망각하는 자연 앞에서
다 잊은 듯 웃고 있는 하늘 앞에서
잠시 주춤거리며 시간을 긷는다.
광란 뒤에 남은
무너진 살림살이들을 애도하며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한 자연이 해맑게 웃는다.
폐허 위에 폐허가 쌓여가는데도
바람은 제 갈 길을 가고,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세상이 노아의 홍수처럼 잠겼던
그 눅눅한 시간조차 잊으란듯
광란 뒤에 남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무를 무화시키고,
무화되는 것
그것이 자연의
자연스러운 힘이란 말인가.
며칠 전, 밤새 물대포처럼 쏟아진 폭우에 사람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모든 게 젖고, 잠기고, 무너졌다. 남부지방은 폐허처럼 주저앉았고 내가 사는 도시는 맑은 하늘이 얼굴을 내밀었다. 등줄기를 따라 바람이 지나갔다. 땀을 식히는 그 바람 속엔 황토 흙냄새와 어딘가 썩어가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하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높았고, 폭우가 할퀴고 간 땅 위엔 폭격기가 지나간 듯 참담한 흔적이 남았다. 자연은 그토록 잔혹하고 그토록 태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