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기억
색의 기억
빨강은 어릴 적 다친 무릎이었다
약국 냄새, 옥도정기의 핏빛, 소독약의 따끔함
엄마 손끝에 묻은 걱정과 불안
빨강은 아버지의 지게 위에 얹어있던 산딸기였다.
그을린 검붉은 얼굴, 떨어지는 땀방울, 가시의 따끔함
등멱하는 아버지 머리 위로 쏟아진 한여름 태양
사랑과 추억은 그렇게 빨갛게 아프고 따뜻했다
주황은 눅눅한 종이에 눌어붙은 네잎클로버였다
햇빛에 비치면 글씨가 비치던 일기장
썼다 지운 그 계절의 물렁했던 고백들
마당에 서 있던 단감나무의 달딘 단 맛
말랑한 홍시감을 입안에 가득 물고 음미하며
가을은 그렇게 내 안에서 주황빛으로 익어갔다
노랑은 기다리던 버스가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정류장 벤치에 엎드려 있던 햇살이 눈물겨웠고
떠나는 너를 붙잡지 못해 밀려든 혼돈
버스 뒤창으로 보였던 네 뒷모습
햇살에 녹아 노란 그림자가 되었다
파랑은 우물 깊숙한 곳에 갇힌 말이었다
하고 싶었던 말, 하지 못했던 말, 해서는 안 될 말
모두가 물속에 잠겨 바람에 밀려 돌아오곤 했다
오래오래 귓가를 맴돌며 파랗게 가슴을 후벼팠다.
검정은 한밤중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는 나의 눈동자였다
동굴같은 어둠속에서 박쥐처럼 매달려
쿵쾅쿵쾅 내려앉은 어두운 소음을 측량하며
폭염의 한낮이 밀실처럼 다가왔던 때를 떠올리며
밤의 내가 어두워보여도 어둠 속의 나는 괜찮았다
기억의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감각
오래 묻어둔 슬픔, 스쳐간 손끝, 갈무리해 놓은 추억
아무도 듣지 못한 존재의 존재들이
색깔과 냄새와 빛을 입고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이런 폭염이 계속되는 날이면,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가 생각납니다. 뜨거움 속에서 살아 있는 것들이 녹아내리는 풍경. 그 속에서 이상하게도 바닷가 돌밭에서 넘어져 무릎이 까져 흘러내린 핏줄기와 아버지가 가지째 꺾어오신 빨갛게 익은 산딸기가 덩달아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장면들 곁에, 후각과 청각, 촉각이 부수된 채로 따라붙습니다. 감각들은 하나 둘 색깔의 옷을 입고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주황의 일기장 고백, 노랑의 이별의 아픔, 파랑의 가라앉은 말, 검정의 어두운 내면. 그 모든 것들은 그렇게 해서 기억의 우물에서 기워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 시는 내 안에 녹아든 감각의 색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남긴 자국, 사라졌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장면들을 불러내려 색의 이름을 빌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