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기웃거리다 40

수박이 있는 풍경

by 인상파

수박이 있는 풍경


접시에 수박을 담으며

어머니에게 드시라고 했다

감긴 눈이 슬쩍 떠지고

포크를 손에 쥔 어머니는

수박을 꽂으려다

접시 바닥을 쓸다가

눈을 감은 채 멈췄다

갖다 놓은 손이 무안하고

수박은 꾸어다논 보릿자루

“엄마, 수박이에요. 드셔보세요.”

정막의 부재를 깨뜨렸는데

막 눈을 뜬 생물체처럼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꼬물거리는 눈빛

수박이라는 말에

수박을 확인하는 눈

맨손으로 집으려다 포크를 쥐셨는데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수박이 잠드는 약은 아닐 텐데

정지된 화면처럼

어머니는 미동도 없고

“어머니, 수박이에요. 드셔보세요.”

벌건 고깃덩어리 같은 수박 조각에

박힌 검은 씨가

이번엔 눈에 띄었는지

살점에 박힌 조그만 점들을 빼내려

푹, 푹 수박을 찌르신다

수박은 찔리지 않겠다는 듯

자꾸 미끄러지며 어머니를 애태웠다

생의 끝자락을 쥐고 버티는 뿌리처럼

스스로를 단단히 붙드는 침묵으로

너덜너덜해진 수박을 간신히 허공에 매달았다

덥석 수박 한 조각이 물고 싶어져

“엄마, 한 입만요”

새끼 새처럼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엄마라고 불렀으나

당신이 엄마인 줄 모르고

엄마라고 불렀으나

내가 딸인지도 모르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포크에 꽂힌 너덜너덜한 수박 조각을

내 입 쪽으로 뻗어오신다

하지만 그 길은

탄탄 대로가 아니어서

찢기고 닳은 수박은

입으로 가는 도중

포크에서 뚝 떨어진다

어머니는 다시 수박을 겨루고

포크 끝엔 식탁 긁는 소리만 맴돈다

눈은 다시 감겼고

시간은 당신 안의 여름으로

미끄러진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엄마, 한 입만요”

하고 정막의 부재를 깨뜨렸는데

감긴 어머니의 눈이

스르르 풀리고

멍이 든 수박을

포크에 간신히 매달고

마주 앉은 사람의 벌린 입으로

힘겹게 팔을 뻗는다

딸인지 며느리인지 묻지 않고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에게로


요즘 같은 폭염에 어머니와 수박을 먹는 즐거움이 있다. 수박을 식탁에 놓을 때마다 어머니는 그 수박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목소리와 표정으로 바라보신다. 혼자선 식사는 잘 못하시지만 수박을 드실 때만큼은 포크에 꽂아 즙을 흘리시며 참 공을 들여 드신다. 지켜보고 있으면 수박을 처음 먹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그 옆에서 입을 벌리고 “엄마, 한 입만”하고 어리광을 부린다. 어머니의 손이 뻗어올수록 나는 머리를 살짝 물러서며 그 팔이 더 멀리 뻗기를 바란다. 나의 실없는 욕심을 알아채셨는지 어머니는 눈을 흘기신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다시 보고 싶어 나는 또다시 “엄마, 한 입만” 하고 입을 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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