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세상에 태어난 아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

by 인상파

세상에 태어난 아이, 사노 요코, 임은정 역, 프로메테우스출판사


세상에 태어난 아이


세: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때는

상: 상심할 일 없었지요.

에: 에메랄드빛 가득한 지구별에서

태: 태곳적부터 태연히 빈둥빈둥

어: 어딜 가든 무심한 부재였어요.

난: 난 이제 알 것 같아요

아: 아득히 들려오는 엄마의 사랑 노래

이: 이번 생에 태어난 아이인 걸요.


태어난 일, 그것 참 피곤하지요


참으로 독특한 그림책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품고 있던 ‘던져진 생’이라는 사유를 새롭게 되돌아보게 만든 작품이었지요. 사노 요코의 그림책은 늘 그렇듯 한 번 보고 끝나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하게 하고, 다시 생각하게 하고, 시차를 두고 또다시 돌아보게 만듭니다. <백만 번 산 고양이>도 그렇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생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여지없이 깎아내리며, 오래 사는 삶보다 단 한 번의 진실한 ‘사랑’이 있는 삶이 더 값지다고 말하지요. <세상에 태어난 아이> 역시 생은 타인에 의해 ‘버려진’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하고 도달한 열망의 실현임을 말합니다.


저는 자라면서,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서 생과 사에 대해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해 왔습니다. “왜 태어났을까”를 묻기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탐구했어야 했는데, 그 질문 앞에서 저는 언제나 낙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단선적인 시간의 끝에 기다리고 있을 죽음은 저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했지요. 그럼에도 살아내야 한다는 건 언제나 커다란 숙제였고, 납득되지 않는 것을 제 나름대로 합리화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그림책을 통해, 인간이 태어난 데 어떤 거창한 이유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태어나기 전부터 이 세계 주변을 맴돌며 ‘때’를 기다려왔다는 느낌, 그에 대한 확신을 저는 조금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림책을 보며 여러 생각이 오갑니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고통도, 슬픔도 없었겠지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나와 무관한 일이 될 테고, 나는 바람이나 흙, 풀잎처럼 의식 없이 머물기도 했을 것이고 형체 없는 존재로 지구를 떠돌기도 했겠지요. 그러다 우연히, 혹은 필연처럼 누군가의 체온에 스치며 엄마를 만나게 된 겁니다. 엄마의 사랑, 그 ‘반창고’를 붙이고 싶은 간절한 열망으로 아이는 태어났던 거겠지요. 그냥 태어났던 게 아니고요. 태어나려는 열정과 의지가 생명을 만들어낸 거지요. 하지만 아이는 너무 빨리 알아버렸습니다. 태어난 일, 그것 참 피곤하다는 것을. 그래도 엄마가 있고, 사랑이 있으니 그 피곤함은 그럭저럭 견딜 만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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