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돼지가 주렁주렁

돼지가 주렁주렁

by 인상파

돼지가 주렁주렁, 아놀드 로벨 글, 애니타 로벨 그림, 엄혜숙 옮김, 시공주니어


돼지가 주렁주렁


돼: 돼지를 같이 키우자 해놓고

지: 지붕에서 돼지 비가 내려야,

가: 가지마다 돼지 열매가 열려야,

주: 주인은 아내를 돕겠다고 해요.

렁(엉): 엉덩이를 걷어차도 소용없자

주: 주머니 사정이 쪽박이라고 바가질 긁으니

렁(엉): 엉금엉금 침대를 기어 나왔대요.


주렁주렁 돼지, 주렁주렁 핑계


슬라브족이 떠오를 만큼 화려한 색감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책이 마치 슬라브 민족의 옛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먼저 말을 꺼내놓고는 슬그머니 발을 빼는, 그래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게으름에 대한 풍자라고 하겠습니다. 양성평등을 이야기하는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돼지는 그저 돼지인 거지요. 사랑스럽고 또 잘만 키우면 절로 크는 돼지말입니다. 문제는 그 많은 돼지를 오롯이 여자 혼자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료 한 포대로 쉽게 해결되는 요즘과 달리, 옥수수를 직접 심어서 돼지 밥을 준비해서 키워야 했으니 그 수고로움이야 오죽했을까요.


게으른 남편과 산다는 건 참으로 고되고 인내가 필요한 일입니다. 입으로는 함께하자면서 몸은 도통 움직일 줄 모르니 말입니다. 처음에 아내는 돼지를 사려는 남편을 말렸겠지요. 그것도 12마리라니요. 욕심도 많지요. 함께 사는 남편의 게으른 버릇을 모르지 않았을 테니 말이에요. 하지만 남편은 힘을 합치면 가능하다며 아내를 꼬드기지요. 그 말에 혹했던 아내는 잠시나마 남편의 변화를 기대했겠지요. 하지만 남편은 돼지가 마당에 꽃처럼 피고,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리고,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오면 돕겠다는 황당하고 실현 불가능한 말을 늘어놓지요. 잘라 말해 일하기 싫다는 거였지요. 그래도 아내는 그런 남편의 말을 어떻게든 들어주고자 마당에 돼지를 풀고, 나뭇가지에 매달고, 지붕에서 떨어뜨리고 하면서 그럴 듯하게 꾸며보지만 남편은 침대에서 꿈쩍도 하지 않지요. 아내의 정성에 마음이 동할 만도 하지만 아내의 노동을 외면하며 게으름만 피운 거지요.

돼지가 없으면 아내의 잔소리도 없을 테지요. 결국 남편은 “그놈의 돼지들, 봄눈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내뱉고, 아내는 정말로 그 말대로 돼지들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이제 성가실 것도 없으니 남편은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요. 그런데 돼지가 사라졌다는 아내의 말에 남편은 겁을 먹고, 돼지들을 찾아달라며 애원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남편에게 가장 무서운 건, 돼지들이 아니라 아내의 단호함이 아니었을까요. 게으름엔 약도 없다고 하는데 이 그림책은 조금 다른 말을 덧붙입니다. 게으름엔 약이 없지만, 인내와 지혜로 길들일 수는 있다고.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남편의 말을 따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게으른 남편을 마주하며 싸워냈습니다. 저라면 속에서 열불이 났을 텐데 농부의 아내 정말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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