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달아난 수염

달아난 수염

by 인상파

달아난 수염, 시빌 웨타신하 글과 그림, 엄혜숙 번역, 보림


달아난 수염


달: 달아나요 빨리빨리

아: 아주 날쌘 수염이 술래예요.

난: 난 머리꼭지 안 보이게

수: 수수꽃다리 속에 숨었는데

염: 염소수염이 불쑥 나타났어요.


수염이 집을 나갔다고요?


수염을 자를 도구가 없었던 옛날 스리랑카 이야기입니다. 바분이라는 할아버지는 수염이 자랄 때마다 생쥐에게 이빨로 수염을 잘라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생쥐 이빨이 무뎌지자 생쥐에게 이를 뾰족하게 갈고 오라고 시켰는데 그 틈에 수염이 무섭게 자라더니 집을 빠져나가 마을 사람들과 나무들을 칭칭 감아버립니다. 우리의 옛이야기 '불가사리'처럼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같은 맥락이지요. 수염 때문에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이 고통받으며 우왕좌왕 당황할 때, 땔감을 줍고 있던 한 꼬마 여자아이가 쫓아오는 수염을 피해 도망쳐 그 수염을 집 화덕에 갖다 댑니다. 그제야 수염은 점점 짧아지면서 마을 사람들을 풀어줬고 바분 할아버지는 수염을 자를 필요가 없어졌답니다. 이 엉뚱하고도 신선한 이야기는 출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동남아시아 그림책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책이 출간되었을 때, 문화적인 충격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보다도 생동하는 수염의 박력이 넘치는 그림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습니다. 시빌 웨타신하는 그림을 독학하면서 15세에 그림책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림책상을 받았고 자국의 그림책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독학이라는 이력 때문인지 그림에서 어떤 틀은 보이지 않고 무한한 자유분방함이 느껴졌지요. 수염이 달아난다는 발상은 <엉덩이가 집을 나갔어요>라는 그림책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신체 일부가 주체가 되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두 책은 닮았습니다. 이렇게 상상력의 경계를 유쾌하게 넘나드는 그림책과의 만남은 즐거움을 배가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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