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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기웃거리다 48

잡초

by 인상파

잡초


잡초는 오래된 책처럼

읽히지도 않고 버려지지도 않는다.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이름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밤이면 뿌리끼리 손을 맞잡고

지렁이의 귀에 흙의 편지를 부치고

고양이 똥 같은 사랑싸움이 벌어지면

자기들끼리 귀를 간질이며 까드득 웃는다.


물방울이 풀잎에 걸리는 새벽

어둠을 견딘 자에게만 주어지는

은빛의 세례처럼,

햇살은 잡초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낮이 오면 사람들은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는데

막대기로 치고 지나가거나

발끝으로 뭉개면서

돌멩이를 밟듯 지나쳐 간다.


비어버린 서가의 책등처럼

어느 날 제초기로 밀려나간 자리

허전한 땅을 본 사람은

불러보지 못한 이름의 부재를 실감한다.


잡초는 사랑받지 못해도

풍경의 풍경을 지킨다.

그늘이 필요한 자리에 그늘이 되고

바람이 스쳐야 할 자리에 바람을 부른다.


존재하는 것이 곧 이름이듯,

사람이 불러준 이름이 없어도

잡초는 존재로 존재를 증명한다.


잡초는 오래된 책처럼

읽히지도 않고 버려지지도 않는다.


사람 손을 타지 않아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것 같고

없는 듯 보이지만 없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잡초는 땅의 편지

하늘의 가장 낮은 목소리가 된다.


폭염이 이어져 풀잎마저 더위를 먹은 듯 축 늘어져 있다. 그러나 꼭 이맘때 풀의 성장은 절정에 달한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제초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풀들이 베어지고 없는 민둥한 자리를 바라보다 보면, 그제야 생각난 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잡초가 무엇이었는가를 묻게 된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은 잡초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잡초라며 함부로 뭉개버리면, 그 빈자리는 빈자리로만 남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잡초에게도 저들끼리 불러주는 이름이 있었을 것이고, 저들만의 생활이 있었을 것이다.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생명에도 서로의 사정과 이야기가 숨어 있었을 터이다. 그걸 엿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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