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쓰릴 줄 알면서도
속이 쓰릴 줄 알면서도
술이 술을 부른 날은
속이 쓰릴 줄 알면서도
낯선 나를 떠나보내고자
나를 잃을 수 있는 순간에 머무르고자
낯선 나를 보내는 익숙한 나를 만나고자
술이 나를 먹고 내가 술을 먹는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삿대질한 건
낯선 얼굴의 나인 거냐?
다정한 얼굴의 나인 거냐?
잠들고 있던 어머니가 눈을 뜨신다
딸의 술주정이 마냥 귀여운지
나무껍질처럼 굳은 얼굴에 웃음을 보이시고는
여자가 무슨 술이냐고
자물쇠 같은 입이 풀렸다
딸이 술 먹은 것은 알아보시고
딸을 걱정하시는 어머니를 보니
술을 더 자주 마시며
우리 어머니를 걱정시켜야겠다고
청개구리 같은 마음을 먹는데
속이 쓰릴 줄 알면서도 술을 마신 건
어머니의 웃음을 얻기 위함이라고
어머니, 우리 어머니 오래 사시라고
젊지도 않은 딸이 어머니 품을 파고들며
엄마, 엄마, 엄마를 불러본다
흐릿한 어둠 속이 환해진 것은
마음에 쌓인 먼지의 더께가 씻겨서이겠지
좀 더 사람답게 살아야겠다고
술과 손가락을 내걸고 약속했건만
아침은 이미 정오에 밀려와 있었다
가끔 스스로 전복하고 싶다.아니, 전복되고 싶다. 아니, 둘다다. 평범함의 반복, 무료함의 궤도를 벗어나 흠집을 내고 싶다. 술은 그 흠집의 문을 연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미워하던 것들을 애정하게 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조차 잠시 용서할 수 있다. 속이 쓰릴 걸 안다. 며칠은 앓을 것이다. 그럼에도 술은, 나를 전복시켜 다른 존재로 서게 하는 의식같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