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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사람 같은 건 없고

by 인상파

채만식의 『태평천하』(문학과지성사)


하나도 사람 같은 건 없고


1937년 1월부터 9월까지 《조광》에 연재된 이 작품은 윤씨가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다룬 가족사소설이다. 아버지 윤용규가 화적패에게 죽임을 당하자 윤직원은 아버지가 남긴 재산으로 벼슬을 사고 재력을 늘려 만석꾼이 되었지만 그의 재물은 자식과 손자들의 노름과 주색잡기에 줄줄이 새어나간다. 그런 점에서 염상섭의 『삼대』와 공통점이 있다. 경제권을 1대인 할아버지가 쥐고 있고, 자식은 주색과 노름에 빠져 살며, 손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를 거스르고 그나마 제정신으로 살아가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태평천하』에서는 손자가 둘이다. 큰손자 종수는 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고, 동경 유학을 간 종학은 사회주의 운동을 한다는 점에서 『삼대』의 덕기 쪽에 더 가깝다.


『삼대』가 덕기를 통해 집안의 윤리적인 가장의 가능성을 남겼다면, 『태평천하』에서는 윤직원 영감이 누려온 태평한 시대가 끝나고 윤씨가의 몰락으로 이어질 결말로 치닫는다. 『삼대』의 4대는 아직 어린아이로 중심에 나서지 못하지만, 『태평천하』에서는 중학생 경손이가 윤직원 영감의 애인 춘심이와 연애를 하면서 작품의 재미를 더한다. 춘심이라는 어린 기생을 두고 벌어지는 조손간 연애는 집안에는 과부만 잔뜩 모여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여자가 부족해 조손이 한 여자를 두고 다투는 꼴이라며, 이를 ‘규모 집안다운 계집 소비 절약’이라는 기막힌 풍자로 서술된다.


경손이는 싹수가 노랗기는 해도 집안 인물 중에서는 어리지만 그나마 분별력이 있다. 그는 집안 어른들을 하나같이 우습게 여기지만 숙부 종학만은 그들과는 다른 세계의 인물로 여기며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종학은 일본 유학 중으로 훗날 경찰서장이 되어 집안을 빛낼 거라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는 작품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니 없는 존재나 다름없다. 다만 작품 말미에서 전보 한 장으로 집안을 뒤흔들며 부재 속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작품은 윤직원 영감이 인력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인력거꾼에 제대로 된 삯을 주지 않으려고 흥정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윤직원 영감은 ‘이십팔 관 하고도 육백 몸메’라 하니 대충 105킬로그램쯤 된다. 그런 그가 날아갈 것 같은 빈약한 몸의 인력거꾼에게 오르막길을 오르게 하면서 삯을 주지 않으려고 말꼬리를 잡더니 50전 삯을 25전으로 깎는다. 그러고는 두말하지 못하게


“이제넌 자네가 내 허리띠에다가 목을 매달아두 쇠천 한 푼 막무가낼세!”


라고 딱 잘라 뗀다. 늦둥이 바보 태식이에게는 과자 사먹으라고 10전을 냅다 던져주면서도 인력거꾼에게 줄 1전이 아까워 그리 모질게 군다. 풍채만 컸지 마음씀씀이는 소갈딱지 만하여 그 육중한 몸이 벌이는 행태가 풍자의 대상이라, 그 말하는 모양새가 반어적 표현 기법을 동원하고 있어 묘하게 맛깔스럽고 재미나다.


윤직원의 인색함은 어린 동기와 집안 여자들에게 보이는 추태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아내가 죽은 후에도 어린 애인을 구해 보려 동분서주하고 어쨌든 한 살이라도 젊어보이려고 일흔둘의 나이를 예순다섯으로 속이며 열네 살 춘심이를 구워삶으려 무진 애를 태운다. ‘연애는 환장’이라고 하더니 안간힘을 쓰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가소롭다. 자동차 대신 버스를 타며 일부러 잔돈을 거스리기 어려운 점을 악용하여 큰돈을 내고 무임승차를 하거나, 춘심의 마음을 사려고 반지를 사면서도 정가제 가게에서 억지를 부리며 값을 깎으려 든다. 자식들이 수천 원을 주색과 노름에 쓰는 줄 모르고, 자신은 몇 전을 아껴보겠다고 그리 궁상맞게 구니, 체통 없는 인색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더해서 가족들이 먹는 쌀밥이 아까워 보리밥을 먹으면 애가 잘 든다며 독수공방하는 손자며느리를 부추기는 것은 구차한 인색을 넘어 희비극 같은 추태다.


윤직원 영감의 입은 걸다. 남자는 ‘잡아 뽑을 놈’, 여자는 ‘쫙 찢을 년’이라 부르며, 입에서 쏟아지는 욕설은 거칠고 저속하다. 며느리와 고성이 오가도 집안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 그 둘의 소란은 한바탕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떠올리는 다정하고 중후한 ‘할아버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거구의 몸으로 몇 푼을 아끼려 궁색하게 구는 인색한이고, 욕설로 위신을 깎아내리며 스스로를 소모하는 영감이다.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를 태평천하로 인식하는 왜곡된 역사의식을 드러낸다.


그의 욕설은 손자 종학의 전보 소식을 접했을 때 절정에 이른다.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 종학은 부정한 축재로 쌓아올린 윤씨가의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는 존재다. 윤직원 영감에게 일제 치하는 자신의 재산을 지켜주는 태평한 시대 곧 ‘태평천하’다. 그런 세상에 사회주의를 한다는 것은 그에게 ‘깎아 죽여도 아깝지 않은 짓’으로 받아들여진다.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은 부정한 곳에 뿌려지게 돼 있다. 그리고 부패한 집안에서 그 부패함을 뚫고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내닫는 경우도 더러 있다. 말하자면 친일하는 집안의 자식이 독립운동을 하는 경우처럼.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한 종학이가 그런 인물이 아닌가 싶다. 증조할아버지는 어린 동기를 꾀고, 할아버지는 노름과 주색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며, 아버지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고, 집안 여성들은 발언권조차 갖지 못한 채 굴종적인 삶을 살고 있을 때 만리장성의 성벽을 무너뜨리듯 날아든 전보 한 장. 종학이 던진 전보 한 장이 허울 좋은 태평천하를 뒤흔들고, 그렇게 이 집안의 몰락은 시작된다. 결국 남는 말은 하나다. 허울 좋은 태평천하였지만, 그 안에는 ‘하나도 사람 같은 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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