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의 「태형」(창비)
살아남기 위하여
김동인의 「태형」은 염상섭의 「만세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만세전」이 3‧1운동 직전의 비참한 조선 현실을 보여준다면, 「태형」은 3‧1운동에 가담한 조선인들의 감옥생활을 다루며 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혹한 처벌을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극한 상황에서 작동하는 것은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뿐이라는 점에서, 「감자」나 「배따라기」처럼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제 ‘옥중기의 일절’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작가의 옥중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5평 남짓한 감방에 41명의 수인이 기거해야 했다는 사실은 만세운동으로 잡혀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말해준다. 수인들의 대화 속에서 가족과 함께 만세를 부르다 무참히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사연도 들려오고, 3‧1운동 이후 곧 독립이 될 것이라는 풍문도 스쳐 지나간다.
때는 6월 중순. 무더위에 땀은 쉴 새 없이 흐르고, 좁디좁은 감방에서는 눕지도 앉지도 못한 채 하룻밤을 삼등분해 교대로 잠을 청해야 했다. 인원을 훨씬 초과한 그 공간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고,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송장 같은 사람’들만이 가득했다.
“둥그렇게 구부러진 허리, 맥없이 무릎 위에 놓인 팔, 뚱뚱 부은 시퍼런 얼굴에 힘없이 벌어진 입, 정기 없는 눈, 흩어진 머리와 수염, 모든 것은 죽은 사람이었었다.”
한때는 독립을 외치며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었지만, 그 속에서 남을 생각할 여유는 사라지고 오로지 ‘냉수 한 모금’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라며 고향이며 친척조차 뒤로한 채,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 군상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석 달이 지나도록 판결은 지지부진했고, 감방은 나가는 사람 없이 들어오는 이들로 가득했다. 그런 가운데 자식 둘을 만세운동에서 앞세웠던 영원 영감이 태형 90대를 언도받는다. 사실상 죽음과 별다를 바 없는 형벌 앞에서 그는 공소를 제기하지만, 주인공은 오히려 그를 비난하며 몰아세운다.
“여보 시끄럽소. 노망했소? 당신만 사람이란 말이요? 이 방 사십여 인이 당신 하나 나가면 그만큼 자리가 넓어지는 건 생각지 않소? 아들 둘 다 총 맞아 죽은 다음에 뒤상 하나 살아 있으면 무얼 해?”
그 말에 감방 사람들도 가세해 ‘노망하였다’, ‘바보다’, ‘제 몸만 생각한다’ 하며 야유를 퍼붓는다. 결국 영원 영감은 공소를 취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형을 맞으러 끌려나가 죽음을 맞는다. 떠나기 전 그가 남긴 말은 처연하다.
“칠십 줄에 든 늙은이가 태 맞구 살길 바라갔소? 난 아무캐 되던 노형들이나……”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감방 사람들의 손에 의해 사지로 내몰린 한 인간의 절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인간다운 면모를 보인 사람이, 바로 그 ‘주책없는 늙은이’였다.
작품을 덮으며 오래 마음이 먹먹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살고자 몸부림친 노인의 모습이 동료들의 야유 속에서 오히려 비난받고 사라져간 장면이었다. 인간다운 얼굴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살아남으려는 의지는 끝내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이 작품은 김동인의 「광염소나타」나 「광화사」와 달리,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영원 노인의 비참한 최후는 특히 오래 남는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연장하는 일이 아니다. 타인을 짓밟고 품위를 잃은 채 겨우 숨만 이어가는 삶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다운 얼굴을 지켜내려는 태도, 그것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물음의 진짜 의미일 것이다. 영원 노인은 살아남는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