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의 『장마』(휴이넘)
암시롱토 않은 일은 없다
윤흥길의 『장마』는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전쟁터의 총성과 포화가 아니라, 초등학교 3학년 아이의 눈으로 비친 집안의 불상사에 초점을 맞춘다. 작품은 전쟁이 어떻게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성을 말살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쟁이 터지자 친할머니는 외할머니 가족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둘도 없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삼촌은 인민군 활동에 뛰어들고, 외삼촌은 국군에 자원하면서 두 할머니의 관계도 서서히 냉각기에 접어든다. 장마가 시작되는 시기와 맞물려, 외할머니는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는다. 그것은 슬픔 그 자체이자, 빨치산에 대한 원망을 키우는 불씨였다. 외할머니로서는 국군 아들의 죽음이 곧 빨치산 삼촌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남과 북, 인민군과 국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그 어떤 이념도 체제도 알지 못하는 순박한 할머니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던 이유는 단지 서로 다른 노선을 택한 아들들이 전쟁터에 나갔기 때문이었다. 외삼촌의 죽음은 통지서로 확인되었지만, 삼촌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읍내에선 전투가 잦았고, 인민군의 시체가 경찰이나 군인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나뒹군다는 소문이 돌았다. 삼촌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해졌다.
그런데 장마가 시작되기 전, 가족은 한밤중에 잠시 삼촌을 만난 바 있었다. 고모의 연락 덕분이었다. 가족은 삼촌을 자수시켜 함께 살 길을 찾고자 했지만, 수상한 인기척에 놀란 삼촌은 끝내 도망쳐 버렸다. 가족들은 이 일을 철저히 비밀로 하자고 당부했지만, 어린 동만이는 초콜릿에 눈이 멀어 형사에게 고자질하고 만다. 그로 인해 아버지는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동만이는 과자 한 봉지 때문에 ‘사람백정’으로 낙인찍히며 할머니의 미움을 산다. 그는 외할머니 방으로 쫓겨나고 외출조차 금지당한다.
외삼촌의 전사통지서를 받고 외할머니는 불길한 꿈이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에 착잡해하면서도 “암시롱토 않다”는 말을 되뇌었다. 그것은 태연한 체하려는 몸짓이었으나, 실은 자식을 잃은 외할머니 나름의 애도 방식이었다. 외할머니는 죽은 아들을 대신하듯 동만이를 붙잡고, 아들의 무용담을 들려주며 그의 성기를 만지기도 한다. 어눌하고 왜곡된 그 행위 역시 슬픔을 견디려는 몸부림이었다.
갈수록 두 할머니의 갈등은 노골화되고, 장대 같은 비가 퍼붓던 날 외할머니는 반미치광이가 되어 빨갱이가 숨어있다는 건지산을 향해 절규한다.
“더 쏟아져라! 어서 한 번 더 쏟아져서 바위틈에 숨은 뿔갱이들 다 씰어 가그라! 한 번 더, 한 번 더, 옳지! 하늘님, 고오맙습니다!”
자식 잃은 어머니의 증오와 분노의 분출이었지만, 그것은 친할머니에게는 곧 삼촌이 죽으라는 저주와 다름없었다. 친할머니는 이에 맞서 외삼촌의 죽음을 외할머니 탓으로 돌리며, 상처 난 가슴에 소금을 뿌린다. “전생에 죄가 많아 그렇다”는 말로 잔인하게 응수한 것이다. 급기야 외할머니 입에서 “뿔갱이 집”이라는 금기어가 터져 나오면서 두 집안은 벼랑 끝에 몰린다. 그것은 단순한 욕설이 아니라 집안 전체의 몰살을 부르는 낙인과도 같았다.
그 뒤 할머니는 삼촌이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믿고 아들을 맞이할 기대에 온갖 정성을 쏟지만, 결국 삼촌은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아침나절, 사람 키만 한 구렁이가 집 안으로 들어온다. 예로부터 구렁이는 죽은 자의 혼이 깃든 존재로 여겨졌다. 곧 그것은 삼촌의 죽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할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지고, 외할머니는 그 구렁이를 삼촌의 넋이나 되듯 받들어 집 밖으로 내보낸다.
남과 북을 상징하는 외삼촌과 삼촌은 서로 다른 이념을 좇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집안의 어른들까지 3·8선처럼 갈라놓았다. 그러나 구렁이를 맞이하고 보내는 과정을 통해 죽음과 원한을 씻어내는 작은 의식이 이루어지고, 두 노인은 화해에 이른다. “암시롱토 않다”는 말로 버텼던 외할머니는 비로소 구렁이를 통해 고통과 슬픔을 조금은 내려놓은 것이다.
장마처럼 지루하고 지리멸렬한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자는 말 그대로 암시롱토 않을 수 없다. 전쟁이 남긴 참상과 상흔은 끝내 품고 살아가야 한다. 자식을 잃은 할머니들은 실낱같은 기대로 연명하거나, 과거에 매달리며 현실의 무게를 잊으려 한다. 어린 동만이에게도 전쟁은 ‘초콜릿 때문에 삼촌을 팔았다’는 부끄러움과, 어른의 ‘치명적인 배신’을 목격한 쓰라린 기억으로 남았다.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마치 모든 불행이 장마 탓인 듯 내뱉은 말. 그러나 우리는 안다. 장마가 끝나도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할머니의 임종 자리에서 손자와의 화해가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전쟁의 종식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으로도 더 많은 용서와 더 많은 화해가 필요함을 예고한다.
결국 『장마』는 거대한 이념 전쟁의 참혹함을 ‘한 집안의 불상사’라는 축소판으로 보여준다. 구렁이의 출현처럼 기묘하고 상징적인 사건을 통해, 인간은 원한과 고통 속에서도 끝내 화해와 용서를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암시롱토 않다”는 말은 체념의 언어이자 동시에 소망의 언어다. 전쟁이 남긴 상처 앞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암시롱토 않은’ 날이 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장마’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