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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33

인간의 어둠을 비추는 인과응보

by 인상파

이광수, 〈무명〉(창비)


인간의 어둠을 비추는 인과응보


이광수의 〈무명〉은 김동인의 〈태형〉과 더불어 감옥을 다룬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두 작품 모두 작가의 실제 옥중 체험이 서사의 밑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3·1 만세운동 후 체포된 죄수들의 참상을 다룬 김동인의 〈태형〉이 시대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면, 〈무명〉은 훨씬 더 내면으로 향한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바 있는 이광수는 그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병감(病監)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무지와 탐욕, 질투와 증오로 점철된 인간 군상의 초상을 그려 보인다.


‘무명(無明)’이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불교적 색채가 짙다. ‘무명’은 곧 어둠의 세계,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으로 인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인간의 모든 번뇌는 이 무명에서 비롯된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작가의 《무정》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신문명과 자유연애의 이상을 노래했다면, 〈무명〉은 정반대의 자리에서 인간의 욕망과 무지를 응시한다. 기독교의 구원이 ‘신의 은총’에 있다면, 불교의 깨달음은 ‘스스로의 업(業)’에서 비롯된다. 이광수는 바로 그 인과응보의 질서를, 가장 비극적인 공간인 감옥에서 확인한다.


이 단편은 1939년 〈문장〉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감옥이라는 극단적으로 제한된 세계 속에 인간의 어두운 욕망과 그에 따른 응보의 법칙을 정교하게 배치한 작품이다. 수양동우회는 당시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지식인들의 조직이었으나, 일제는 이를 불온한 단체로 규정해 이광수와 주요한 등 181명을 검거했다. 그 감옥살이의 경험이 바로 이 작품의 서사적 뿌리다.


작품 속 화자가 어떤 연유로 감옥에 들어왔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가 잡범이 아닌 사상범임은 충분히 짐작된다.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병감에 수감된 그는 위장병, 설사병 등 각종 질병으로 신음하는 죄수들과 한방을 쓰며, 그들을 관찰하는 자의 위치를 취한다. 사기범이나 방화범과 달리 그는 ‘선생’이라 불리며 일종의 존중을 받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은 우월감이라기보다 체념과 달관에 가깝다. 그는 병감의 아귀다툼 속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오직 “마음에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가만히 누워 있”기만을 바란다.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요 불붙는 집이라면, 감옥은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데다.

게다가 옥중에서 병까지 들어서 병감에 한정 없이 뒹구는 것은 이 괴로움의 세 겹 괴로움이다.

이 괴로운 중생들이 서로서로 괴로워함을 볼 때에, 중생의 업보는 ‘헤어 알기 어려워라’ 한 말씀을 다시금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 한 대목만으로도 작품의 사유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분명해진다. 감옥은 곧 세속의 축소판이자 불교적 윤회의 공간이다. 인간은 그 안에서 업의 굴레를 되풀이하며 괴로움 속에 괴로움을 낳는다.


문서 위조 사기단에게 도장을 파 준 윤은 나이 많은 방화범 민을 괴롭히며 사소한 권력으로 자신을 위로한다. 설사병을 앓으면서도 식탐을 버리지 못해 하루에도 수십 번 똥통을 오르내리고, 마침내 폐병으로 독방에 갇힌다. 정은 윤보다 더 간사하다. 이익을 놓치지 않으려 병감 안에서도 계산을 멈추지 않는다. 불경을 읽으며 무죄를 바라지만, 결국 징역형을 받고 병세가 악화된다. 그와 대조적으로 신문기자 출신 강은 자신의 죄를 담담히 인정하고 공소하지 않는다. 2년의 형을 선선히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스스로의 업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이렇듯 병감 안의 인간 군상은 탐욕과 무지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결말을 맞는다. 악하게 살면 혹독한 대가가 따르고, 죄를 인정한 자만이 구원의 길에 닿는다. 작가는 그 인과의 질서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내가 출옥한 뒤 석 달이나 지나서 가출옥으로 나온 키 작은 간병부를 만나 들은 바에 의하면,

민도 죽고 윤도 죽고 강은 목수일을 하고 있고,

정은 중병환자로 본감 병감에 가 있는데 도저히 공판정에 나가볼 가망이 없다고 한다.”


감옥이라는 밀폐된 세계는 인간에게서 문명과 체면의 외피를 걷어내고, 존재의 원형을 노출시킨다. 병감에는 똥내와 토사내, 병인내가 뒤섞여 역겹고 비릿한 냄새가 진동한다. 그러나 그 악취 속에서도 이광수는 인간 본성의 실체를 드러낸다. 인간은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스스로 먹으며 살아간다. 그 냄새와 고통조차 자신이 만든 업의 그림자다.


〈무명〉은 단지 옥중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탐욕에 대한 성찰로 읽힌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도 깨달음을 구하려는 자가 있고, 욕망에 눈이 먼 자가 있다. 무명은 단순히 감옥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무지와 집착, 그리고 그것이 낳는 괴로움의 초상이다.


이광수는 이 작품을 두고 “소설다운 소설”이라 자찬했다. 실제로 읽다 보면 병감의 공기와 허기진 뱃가죽에서 삐죽 새어나오는 목쉰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환청이 밀려온다. 1930년대에 쓰인 단편이지만, 지금 다시 읽어도 낯설지 않다.


그가 보여준 감옥은 결코 과거의 공간이 아니다. 인간이 어둠을 품은 한, 그 감옥은 여전히 우리 안에 존재한다.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라면,

우리는 어디에서 그 불붙는 집을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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