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려서 돈으로 마감한 인생
김동인의 「감자」(창비)
팔려서 돈으로 마감한 인생
‘감자’라 하면 흔히 김유정의 「동백꽃」을 떠올리게 된다. 그 작품에서 감자는 사춘기의 어색함과 미묘한 감정선을 드러내는 매개로 등장한다. 그러나 내게 더 오래, 더 깊게 각인된 ‘감자’는 김동인의 「감자」다. 김유정의 감자가 순정한 웃음을 머금은 청춘의 징표라면, 김동인의 감자는 가난과 욕망, 그리고 인간의 존엄이 짓밟힌 삶의 상징이다. 복녀가 왕서방의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다 들켜 그와 성관계를 맺게 되고, 그 일이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지금도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감자가 한 여자의 생을 뒤흔들어버린 것이다.
한 여자의 일생을 내리막길로 그리고 있는 김동인의 「감자」는 첫 문장부터, 복녀의 삶이 환경에 의해 철저히 규정될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싸움, 간통, 살인, 도적, 구걸, 징역 —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의 부처는 (사농공상의 제2위에 드는) 농민이었다.”
이 한 문장에 이미 복녀의 운명이 담겨 있다. 그녀가 밟아갈 길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며, 도덕과 생존이 맞서는 자리에서 복녀는 결국 인간이 아니라 ‘환경의 산물’로 내몰린다. 농민으로서의 삶이 막을 내린 순간, 그녀의 일상은 비극적 운명에 서게 된다.
복녀는 가난하지만 법도 있게 자란 농가의 딸이었다. 그러나 열다섯 살 되던 해,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홀아비에게 팔십 원에 팔려가면서 순탄할 수도 있었던 인생의 방향은 완전히 꺾인다. 남편은 게으르고 무능했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면서도 가꾸지 않아 결국 소작할 땅을 잃었고, 처가의 도움마저 끊기자 부부는 평양 성 안을 전전하다 칠성문 밖 빈민굴로 밀려든다.
‘싸움, 간통, 살인, 도적, 구걸, 징역’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서 복녀는 세상의 밑바닥을 마주한다. 부업이라 해봐야 도적질과 매음뿐이었다. 빤빤한 얼굴 덕에 거지도 되기 어렵고, 매음은 도덕이 허락하지 않았다. 부부는 그곳에서도 가장 가난한 축에 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부에서 기자묘 솔밭의 송충이를 잡는 인부로 여인들을 불렀다. 복녀도 그 일에 나갔다가 뜻밖의 사실을 목격한다. 일하지 않아도 웃고 떠들며 더 많은 돈을 받는 여자들, 그리고 그들을 희롱하는 감독의 시선. 그날 이후 그녀는 세상은 성실한 자의 편이 아니라, 눈길을 끄는 자의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인 자기도 그런 일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은 결코 사람으로 못할 일이 아니었었다. 게다가 일 안 하고도 돈 더 받고, 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고…….”
복녀는 매음을 통해 처음으로 돈을 손에 쥐고, ‘한 개 사람이 된 듯한 자신’을 느낀다. 그 표현에는 생존의 최소한을 확보한 안도와 함께, 그동안 밑바닥을 살아오며 느껴온 모멸의 그림자가 섞여 있다. 그녀의 삶을 허락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의 붕괴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몸에 기대 살아갔다. 복녀를 팔아넘긴 아버지, 게으른 남편, 그리고 그녀를 탐한 왕서방까지. 그들은 여자의 삶을 하나의 거래 수단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왕서방의 정부가 되어 잠시 풍요를 맛보던 복녀는, 왕서방이 돈 백 원을 들여 처녀를 마누라로 사오게 되면서 버림받게 된다. 돈도, 의탁하던 삶의 끈도 모두 끊어지고 남은 것은 상처 입은 자존과 복수심뿐이었다.
복녀는 동네 여자들의 말대로, 그 일에 진짜로 ‘강짜’를 하게 된다. 복녀 자신도 마음에 생긴 ‘검은 그림자’를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서방 집으로 색시가 오는 날 한밤중, 복녀는 그 집에 몰래 들어가 왕서방에게 행패를 부리다가 그 분노는 복수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녀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밤중에 복녀의 시체는 왕서방의 집에서 남편의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시체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 사람은 복녀의 남편, 한 사람은 왕서방, 또 한 사람은 어떤 한방의사. 왕서방은 말없이 돈주머니를 꺼내어, 십 원짜리 지폐 석 장을 복녀의 남편에게 주었다.”
죽어서도 복녀는 흥정의 대상이었다. 생전에 남자들의 손을 거치며 팔리고 쓰였던 여자의 몸이, 마지막에는 돈 삼십 원으로 값이 매겨졌다. 그 비극이 단지 복녀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가난한 시대를 떠안고 살아야 했던 여자들의 공통된 운명처럼 읽히는 것은 나만의 선입관은 아닐 것이다.
김동인은 복녀의 타락을 도덕의 붕괴로 보았지만, 그것은 도덕 이전의 생존이었다. 배고픔과 절망 앞에서 인간의 존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작가는 냉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 냉정함은 비판이라기보다, 시대의 부끄러운 얼굴에 가깝다.
복녀의 삶을 더럽힌 것은 욕망이 아니라 가난한 환경이었다. 그 가난은 단지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회가 한 여자를 ‘팔 수 있는 존재’로 묵인한 구조라 할 것이다.
그녀의 이름엔 ‘복(福)’이 있었지만, 그녀가 손에 쥔 것은 복이 아니라 돈의 냉기였다. 그러나 그 차가운 돈조차 그녀에게는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마지막 흔적이었다. 복녀는 그렇게,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버텨야 했던 존재의 비애를 우리에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