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도 잃고 돼지도 잃고
이효석의 「돈(豚)」(가람기획)
여자도 잃고 돼지도 잃고
‘돈’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하면 누구나 ‘錢’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돈은 돈(豚), 즉 돼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결국 돈 이야기이기도 하다. 농촌에서 돼지는 곧 재산이고, 생계의 원천이며,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식이는 가난한 농촌 총각이다. 그는 집집마다 돼지를 길러 새끼를 팔아 돈을 만져보는 걸 보고, 자신도 푼푼이 돈을 모아 암수 한 쌍을 산다. 그러나 수놈이 얼마 못 가 죽자, 남은 암놈 하나에 정성을 다 쏟는다. 방 안 한 켠에 짚을 깔아 재우고, 물도 밥그릇에 따로 받아 먹인다. 아플 때면 나무하러 가는 것도 멈추고 돼지 곁을 지킨다. 그에게 돼지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가족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여섯 달이 지나 암퇘지가 제법 자라자, 그는 읍내 종묘장까지 가서 종돈과 교배를 시킨다. 그러나 실패한다. 한 달 뒤 다시 찾아간 종묘장에서 암퇘지는 교접 도중 놀라 달아나고, 식이는 마치 도망간 분이를 붙잡듯, 그 돼지를 말뚝에 단단히 묶어 둔다. 구경꾼들이 음탕한 농담을 주고받는 가운데, 식이의 머릿속에는 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분이는 그가 마음을 주었던 이웃집 처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마을을 떠났다. “늘 뾰로통해서 쌀쌀하게 대꾸하더니, 그 고운 살을 한 번도 허락하지 않고 늙은 아비를 혼자 둔 채 기어코 도망가 버렸다.” 그날 이후 식이의 마음에는 허전함과 분노가 함께 남았다.
그날 종묘장을 나와 식이는 분이가 버스 차장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버스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없다. 그는 석유 한 병과 마른 명태 몇 마리를 사 들고 귀로에 오른다. 길가에서 문득 철로와 나란히 뻗은 도로를 마주하자, 마음이 흔들린다. 돼지를 팔아 노잣돈을 마련해 분이를 찾아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둘이 공장 직공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꿈을 꾸던 찰나, “우레소리가… 바닷소리가… 바퀴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눈앞이 환해진다. 열차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돼지도 꾸러미도 없는 공허뿐이다.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여자를 잃고, 돼지를 잃고, 꿈마저도 잃었다.
이효석은 돼지의 교접 장면을 통해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욕망을 비춘다. 식이에게 돼지는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분이의 부재를 대신 메우는 존재였고, 짐승의 교접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속에는 억눌린 성적 욕망과 상실의 그림자가 겹쳐 있다. 인간의 본능과 짐승의 본능이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코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이 작품의 비극을 완성한다.
암퇘지의 죽음은 곧 식이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순간이다. 돈(豚)으로 대표되는 생계의 끈과, 분이로 상징되는 인간적 욕망이 동시에 무너진 자리. 이효석은 그 절망의 장면을 통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서늘하게 드러낸다.
그는 결국 여자도 잃고, 돼지도 잃었다. 그러나 독자는 그 잃음 속에서, 삶을 지탱하던 ‘욕망의 온기’가 얼마나 덧없고도 필사적인 것이었는지를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