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으로 이어지는 가족, 밥으로 버티는 인간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문학동네)
밥으로 이어지는 가족, 밥으로 버티는 인간
책을 읽을 때면 그 결을 따라가기 위해 두뇌의 회전을 빠르게 돌려야 할 때가 있다. 때로는 출구를 쉽게 열어주지 않는 책을 읽으며 신경이 곤두서고, 독자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삶을 가르치려 드는 작가나 인물 앞에서는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한다. 작가가 설정한 세계 안에서 그가 제시한 길을 따라잡기 위해 머리를 써야 하는 책은 정신적 긴장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은 다르다. 이 작품은 독자의 긴장을 풀어헤치고, 오히려 웃음과 씁쓸함 사이에서 인간적인 해방감을 맛보게 한다. 품위나 고상함과는 거리가 먼, 그러나 눈을 떼기 힘든 현실적 인물들—이혼, 파산, 전과, 무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칠십이 넘은 엄마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 중년의 삼남매—가 ‘찌질한 무대 위의 인간극’을 펼친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희극이 아니다. 이 작품은 결국 가족이란 무엇으로 이어지는가를 묻는다.
우리 사회는 이미 초고령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사회가 늙어가면 가족도 함께 늙는다. 결혼하지 않은 자녀와 부모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집이 늘고, 세대의 경계마저 흐릿해지는 지금, 『고령화 가족』은 그런 시대의 단면을 예견한 작품이다.
소설에서 엄마는 가족의 중심이자 생존의 원천이다. 세 자식 중 누구 하나 온전한 삶을 꾸리지 못했지만, 엄마는 그 누구의 실패도 탓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어려울수록 잘 먹어야 한다.” 그 말 한마디로 닭죽을 쒀놓고 자식들을 불러들이는 사람, 바로 그가 엄마다. 닭죽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이 가족의 생존과 연대를 잇는 상징이다.
엄마의 연립주택에는 실형을 살고 나온 오함마가 살고 있고, 그곳에 영화로 말아먹고 이혼한 영화감독 아들이 들어온다. 뒤이어 이혼한 딸 미연이 자신의 딸을 데리고 합류한다. 엄마는 그런 자식들에게 훈계도, 도덕도 들이밀지 않는다. 그들은 엄마의 생존 논리에 따라 먹고 자고 싸우며, 가장 본능적인 일에 충실하다. 밥을 먹고, 삼겹살을 굽고, 술을 나누며 싸우고 화해한다. 도덕이나 체면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일이다. 그 밥상의 풍경이야말로 이 소설이 말하는 가족의 본질이자 생존의 철학이다.
이 철학은 소설 후반 인용되는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와 공명한다.
“나는 생각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먹도록 만들어졌다. 그렇고 말고! 먹고 마시고 캐서린과 자는 것이다.”
패배와 상실을 겪은 인간이 고상한 사유나 명예가 아니라, 가장 본능적인 행위를 통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그 문장은 『고령화 가족』의 정신을 대변한다. 화자 역시 오함마의 사기극에 휘말려 죽을 뻔한 뒤, 과거의 후배 캐서린이라는 여자와 한집에서 살며 그 말의 진실을 깨닫는다. 삶이란 결국 먹고, 자고, 버티는 일임을.
엄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진실을 몸으로 살아왔다. 결혼도 어떤 조건을 따지지 않고 아이 딸린 남자와 했고, 남편이 있는데도 전파사 아저씨와 사랑에 빠져 딸을 낳았다. 남의 이목과 체면보다 생존과 감정에 충실한 삶을 택한 사람이다. 그 집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다르고, 엄마가 다르지만, 결국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나눈다. 닭죽이 귀환의 음식이라면, 삼겹살은 현실의 냄새다. 연기 자욱한 식탁 위에서 허세와 좌절이 함께 익어간다.
품위와 고상과는 거리가 먼 이 가족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품격을 만들어주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그 연립주택 쓰레기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헤밍웨이 전집이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프레드릭의 무기가 전쟁과 사랑이었다면, 영화감독에게는 실패한 영화와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 그의 무기였다. 오함마의 무기는 주먹과 허세, 미연의 무기는 날 선 신경질과 생활력, 그리고 엄마의 무기는 언제나 밥상이었다. ‘무기여 잘 있거라’의 제목처럼, 이 가족은 각자의 무기와 작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무기는 끝내 버리지 못한 채 짊어지고 산다.
오함마는 『노인과 바다』를 읽고 자신을 상어에게 뜯기는 청새치에 빗대며 자조하지만, 약장수를 한 방 먹이고 <스팅>의 주인공처럼 유유히 사라질 때는 잠시나마 청새치를 끌어올린 노인의 얼굴을 닮는다. 화자는 자신의 삶을 헤밍웨이의 궤적에 빗대보지만, 그처럼 성공하지도, 품위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고백한다. 헤밍웨이처럼 총으로 생을 끊지는 않겠다고. 완벽하지 않은 인생, 실패투성이의 삶이지만, 그래도 밥을 먹고 하루를 살아내겠다고.
소설의 마지막은 “맘마”라는 단어로 닫힌다. 그것은 그가 세상에 나와 처음 내뱉은 완벽한 문장이었다. 맘마, 아기의 옹알이이자 밥, 그리고 엄마의 또 다른 이름. 닭죽으로 시작해 삼겹살을 거쳐 맘마로 닫히는 구조는 인간은 고상한 무기보다 밥 한 끼로 살아남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집을 떠난 지 20여 년 만에 후줄근한 중년이 되어 엄마 곁으로 모여든 삼남매. 꿈을 품고 떠났지만, 혹독한 세상살이에 패배하고 이혼과 파산, 전과와 무능의 불명예를 안고 돌아온 자식들을 엄마는 아무 조건 없이 받아준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똑같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고령화 가족』의 가족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불행하다. 그러나 그 불행은 파괴나 단절이 아니라, 밥 한 끼의 힘으로 이어지고, 싸우고 욕하면서도 다시 모여드는 정으로 버텨진다.
천명관은 이 작품에서 가족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을 사회의 축소판으로, 인간의 본능이 드러나는 무대로 바라본다. 그 무대 위에서 사람들은 체면보다 생존을, 존엄보다 밥을 택한다. 그러나 그 밥상 위에 모여 앉은 이들의 얼굴에는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온기가 감돈다.먹고 마시고, 싸우고 화해하며,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공통된 분자는 바로 ‘의리’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밥을 먹으며 서로의 삶을 지켜주는 것, 그것이 바로 가족이다. 그 찌질한 삶의 반복 속에서 삶을 지탱하는 것은 생각이나 존엄이 아니라, 오늘도 밥을 먹고 살아내려는 의지와 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령화 가족』은 초고령화 시대의 한가운데서 가족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존 본능을 이야기한다. 무너지고 실패한 인생들이 모여 밥을 나누는 그 장면에서 끝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엄마의 닭죽 한 그릇, 그리고 ‘맘마’라 부르던 그 따뜻한 밥 한 숟가락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