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품은 아름다움
이태준의 〈까마귀〉(창비)
죽음을 품은 아름다움
언제부턴가 까치보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아파트 허공을 메우기 시작했다. 길조니 흉조니 하지만, 선택하여 살 수 없는 처지에서 그들과 더불어 지내다 보니 새에 덧씌워진 상징을 더 이상 따지지 않게 되었다. 새는 그저 새일 뿐이다. 까치가 유달리 시끄럽게 지저귀는 날이라고 해서 특별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까마귀가 떼로 몰려와 아침을 깨우는 날이라고 해서 그날의 기분이 더 울적하거나 불안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길조와 흉조를 말하며, 기분의 징표를 하늘에서 찾곤 한다. 그럴 때면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까마귀의 울음과 죽음을 함께 품고 있는, 이태준의 〈까마귀〉다. 까마귀가 울고, 결국은 폐병 걸린 여자는 죽는다. 여자의 죽음을 다룬 이태준의 〈까마귀〉를 읽을 때면 자주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손택은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사회가 결핵을 단순한 병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시절 사람들은 결핵을 감수성이 예민하고 재능이 많은 이들이 걸리는 병, 즉 ‘예술적 천재의 징표’로 여겼다. 병든 육체가 오히려 정신의 고귀함을 증명하는 듯 여겨졌던 시대였다. 손택은 이런 인식이 질병을 미화하고, 인간의 고통을 낭만적 상징으로 소비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술가들은 여전히 ‘병든 몸’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시대의 어둠을 가장 깊이 있게 탐색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 문단에서 나도향, 이상, 김유정 같은 작가들은 실제로 폐결핵을 앓았고, 그들의 작품에서 병든 육체가 삶의 예민한 감각과 존재의 덧없음을 드러내는 장치로 소환되기도 했다.
이태준의 〈까마귀〉는 한 달에 이십 원 남짓이면 독방을 차지할 수 있는 학생층의 하숙생활조차 뜻대로 되지 않은 궁핍한 작가가, 겨울이라 비워둔 친구의 별장에 기거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침 근방으로 폐결핵 걸린 여자도 요양을 와 있어, 작가는 그녀에게 어떻게든 희망을 주고 싶어 한다. 그녀의 애인이 되고자 했다가, 그녀가 가장 신경에 거슬려 하는 까마귀를 해부하여 그 불길한 이미지를 벗겨내고자 한다.
작품에서 폐병은 단순한 한 여자의 병이 아니라, 그 병을 바라보는 작가 화자에게 병든 시대의 공기와 예술가의 고독을 비추는 거울로 자리한다. 질병의 미화는 황순원의 〈소나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소나기를 맞고 여러 날을 앓다가 홀연히 죽는 소녀의 병에는 이름이 없다. 그 병은 현실의 질환이 아니라, 사랑이 현실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봉인하는 장치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소녀의 청순하고 발랄한 이미지는 그 병을 오히려 품위 있고 처연하게 만든다. 그녀의 죽음은 슬픔보다 맑음에 가깝다. 사랑이 가장 순수했던 순간에 멈춰버림으로써, 그 사랑은 시간의 오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죽음은 소녀를 데려가지만, 동시에 사랑을 가장 깨끗한 형태로 남겨둔다.
〈까마귀〉에서 죽음을 품은 여인의 폐병은 묘하게 매혹적이다. 화자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이 그 사실을 더욱 부각시킨다.
“머리는 틀어올리었고 저고리는 노르스름한 명줏빛인데 고동색 스웨터를 아이 업듯 두 소매는 앞으로 늘어뜨리고 등에만 걸치었을 뿐, 꽤 날씬한 허리 아래엔 옥색 치맛자락이 부드러운 물결처럼 가벼운 주름살을 일으킨다.”
이런 옷차림에서 병색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새 양봉투 같은 깨끗한 이마엔 눈결은 뉘어 쓴 영어 글씨 같이 채근한다. 꼭 다문 입술, 그리고 뽀로통한 콧봉오리에 약간치 않은 프라이드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첫인상은 맑고 산뜻하며, 콧대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남에서 화자는 “잦아든 가을 호수와 같이 약간 꺼진 듯한 피곤한 눈이면서도 겨울 볕 같은 찬 광채가 일어났다.”고 묘사한다. 그녀의 눈을 묘사한 이 문장은 단순한 외모의 기술을 넘어, 병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드러낸다. 병의 징후와 함께 그 속에서 반짝이는 감정의 미묘한 결이 공존한다. ‘약간 꺼진 듯한 피곤한 눈’은 병든 육체의 징표이지만, ‘겨울 볕 같은 찬 광채’는 그 병든 육체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생의 잔광을 보여준다.
이태준은 병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죽음에 임박한 쇠약함 속에서 오히려 투명하게 빛나는 감수성의 순간을 포착한다. 이때 질병은 더 이상 고통의 표식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통로로 바뀐다. 수전 손택이 지적한 ‘질병의 낭만화’가 아닐 수 없다. 병이 육체의 비극이 아니라 영혼의 투명함으로 묘사되는 순간, 질병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예술적 감수성의 은유로 변한다.
결국 이태준은 병을 미화하기 위해 이 묘사를 쓴 것이 아니라, 병든 육체 속에서도 인간이 얼마나 깊이 살아 있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녀의 피곤한 눈은 쇠락의 증거이면서 동시에 생의 마지막 빛이며, 그 빛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 속에서 ‘질병의 낭만화’는 비판이 아니라 존재의 미학적 통찰로 승화된다. 겨울 별장에 머물던 화자는 그날, 여자와 아궁이의 낙엽 타는 소리를 들으며 외로움이 녹는 듯한 따스함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정자지기를 통해 그녀가 폐병 환자라는 사실을 듣는 순간, 그 온기가 순식간에 식는다. 화자는 놀라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입술이 악마 같은 병균을 발산하리라는 사실을 상상만 하기에도 우울하였다”고 고백한다.
무엇보다 여자가 화자에게 전하는 병을 인식하는 방식이 인상 깊다. 그녀는 폐병을 고상하게 포장하며 병에 수반되는 고통을 지워버린다. 처음에는 병을 행복하게 여겼고, “죽음도 아름다운 걸로 알았다”고 말한다. “꽃밭에 뛰어들 듯 아름다운 죽음에 뛰어들 수 있어 기뻤다”고 회상하지만, 지금은 “무섭고 겁이 난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음이 아름답게 생각될 때 죽는 것처럼 행복은 없을 것 같아요.”라고 덧붙인다.
여자의 이런 인식은 손택이 비판한 ‘질병의 낭만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병의 실체적 고통은 사라지고, 대신 병이 한 인간의 영혼을 고귀하게 만드는 상징으로 치환된다. 그녀가 “죽음이 아름답게 생각될 때 죽는 것처럼 행복은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병을 생물학적 현실이 아니라 심미적 경험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손택의 관점에서 보면, 이때 질병은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은유로 작동한다. 그녀가 내뱉는 말은 병든 몸의 고통이 아니라, 그 시대가 결핵에 덧씌운 ‘순수· 영혼의 투명· 죽음의 미학’ 같은 상징의 언어다. 여자는 자신의 병을 말하면서도 실은 사회가 만들어낸 병의 이미지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태준은 바로 그 지점을 포착한다. 그는 병을 미화하는 여인의 언어 속에서 질병의 낭만화가 얼마나 허망한 자기 위안인지를 드러낸다. 죽음을 아름답게 말하는 그 순간에도, 그녀의 내면에는 여전히 “무섭고 겁이 난다”는 육체의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태준은 병을 예술의 장식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병의 이중성, 아름다움과 공포, 정신의 고귀함과 육체의 파괴, 이 맞물리는 그 지점을 응시한다. 그렇기에 질병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인간이 고통을 감당하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은유의 구조로 드러난다.
그녀는 병과 죽음보다 까마귀의 울음을 더 두려워한다. 까마귀를 죽음의 사신으로 여기며 겁을 낸다. 화자는 그녀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잠시나마 그녀의 애인이 되어주려 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사랑하는 젊은이가 있고 그것이 전혀 그녀의 두려움을 잠재우지 못한 걸 알게 된다. 까마귀에 씌워진 불길한 이미지를 없애주기 위해 직접 까마귀를 잡아 배를 가르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화자가 까마귀를 잡아 배를 가르는 장면은 죽음에 대한 저항이자, 동시에 자기 내면의 두려움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그는 죽음을 부정하려 하지만, 결국 그 죽음이 자신 안에도 존재함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녀의 죽음은 화자의 상실이자, 예술가로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을 터.
하지만 까마귀를 해부하고 여러 날을 나무에 걸어놓고 기다려도 여자는 오지 않고, 잡지사에 들렀다 온 어느 날 그녀의 집 앞에 놓인 영구차를 보게 된다. 그녀의 죽음을 알리기라도 한 듯 전나무에는 서너 마리의 까마귀가 앉아 있다. 여자가 죽은 그날 저녁,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들려주며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는다.
“까마귀들은 이날 저녁에도 별다른 소리는 없이 그저 까악까악거리다가 이따금씩 까르르 하고 그 GA 아래 R이 한없이 붙은 발음을 내곤 하였다.”
그녀의 죽음은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대신 까마귀의 울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GA 아래 R이 한없이 붙은 발음”은 인간의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고통의 소리, 즉 은유로 덧칠된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서 들려오는 현실의 울음이다. 죽음을 낭만적으로 포장하던 여인의 언어가 끝난 자리에, 이제는 아무 의미도, 아름다움도 없는 자연의 소리만 남는다. 이태준은 그 소리를 통해 ‘병의 은유’를 완전히 걷어내고, 인간이 죽음 앞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고통의 실체를 들려준다. 까마귀의 울음은 그 자체로, 질병의 낭만화가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되살아난 삶과 죽음의 진실한 목소리다. 그녀의 병은 삶을 조금씩 갉아먹었지만, 그 속에서 오히려 가장 빛나는 인간의 결을 드러냈다.
〈까마귀〉는 분명 손택이 말한 ‘질병의 은유’ 구조 속에서 출발한다. 병든 여인은 자신의 폐병을 아름답게 포장하며, 죽음마저 순수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린다. 이태준은 그 모습을 통해, 병이 어떻게 시대의 감수성 속에서 낭만화되는가를 정밀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여인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라, 까마귀의 울음 속에 스며드는 언어 밖의 고통으로 그려진다. 그 울음은 병이 사회의 은유로 소비될 때 지워졌던 고통의 실체가 다시 되돌아온 순간이다.
이태준은 질병의 은유를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그 은유의 한계를 예민하게 감지했다. 그는 병을 낭만화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허상임을 드러내고, 고통이 미화된 언어 뒤에서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그는 은유와 현실, 미학과 고통이 맞닿은 그 경계에서 문학의 자리를 만들어낸다. 그 자리에서 까마귀의 울음은 단순한 죽음의 전조가 아니라, 병든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끝내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목소리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