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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38

가난한 예술가의 처로 살아가기

by 인상파

현진건의 「빈처」(가람기획)


가난한 예술가의 처로 살아가기


현진건의 작품 속 아내들은 하나같이 처량하다. 남편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한 채, 가난과 고단함 속에서 묵묵히 살아간다. 「빈처」의 아내 역시 예외가 아니다. 「술 권하는 사회」의 아내가 남편의 지적 허영과 냉소에 시달렸다면, 「빈처」의 아내는 가난한 예술가의 꿈을 함께 짊어진 인물이다. 두 작품은 마치 한 가정에서 일어난 두 개의 에피소드처럼 닮아있지만, 갈등의 초점은 다르다. 전자가 정신적 괴리에서 비롯된다면, 후자는 생계의 절박함이 낳은 불화다.


「빈처」의 남편은 열여섯에 자신보다 두 살 위인 아내와 결혼한 뒤, 공부를 핑계로 일본과 중국을 떠돌았다. 그러나 돈이 없어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그는 2년이 넘도록 무직 상태로 지낸다. 그럼에도 ‘언젠가 유명한 작가가 될 것’이라는 한 줄기 희망을 붙잡고 독서와 글쓰기에 매달린다. 문제는 그 꿈이 단 한 푼의 보수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활은 온전히 아내의 손에 달려 있다. 그녀는 친정에서 식량을 얻어오고, 세간살이를 전당포에 맡기며 근근이 살아간다.


그럼에도 아내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세상은 무능한 남편을 비웃지만, 그녀는 남편의 가능성을 믿으며 고단한 일상을 견뎌낸다. 그러나 마음의 그늘은 어느 날 문득 드러난다. 가까운 친척 T가 자기 아내에게 줄거라고 사 온 양산을 자랑하자, 아내의 얼굴에 미묘한 그늘이 드리운다. 그리고 무심히 남편에게 던진, 남들 사는 것처럼 좀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는 말은 남편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남편은 불같이 성을 내며 쏘아붙인다.

“막벌이꾼한테 시집을 갈 것이지 누가 내게 시집을 오랬어! 저 따위가 예술가의 처가 다 뭐야!”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밤이 되자 그녀는 다시 일어나 내일 아침 끼니를 걱정하며, 전당포에 맡길 제 옷을 장롱 속에서 찾는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괜히 자격지심이 올라 괴롭게 군다.


“점점 구차한 살림에 싫증이 나서 못 견디겠지?”


“나를 숙맥으로 알우?”


“그러면 그것 모를까! 오늘까지 잘 참아 오더니 인제는 점점 기색이 달라지는 걸 뭐! 물론 그럴 만도 하지만!”

결국 이 싸움은 ‘칼로 물 베기’다. 남편의 분노는 생활고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고, 아내의 눈물은 사랑이 무너질까 두려운 마음에서 나온다. 싸움 끝에 남편은 자책하며 아내가 마음속에 품었음직한 말을 속으로 중얼거린다. ‘네가 6년 동안 내 살을 깎고 저몄구나, 이 원수야.’


이 부부의 다툼은 박지원의 「허생전」을 떠올리게 한다. 허생 역시 하던 공부를 접고 살림에 보탬이 될 일을 하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아내를 둔다. 그러나 허생은 글을 그만두고 장사에 나서며, 조선의 경제 규모를 시험해보려는 대범한 실험에 나선다. 반면 「빈처」의 남편은 그렇게 큰 포부도, 배포도 없다.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아내의 잔소리조차 견디지 못하는 소심한 근대 지식인일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근대적 ‘자아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돈 잘 벌어다준 남편을 둔 처형이 남편에게 맞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내는 그제야 깨닫는다. ‘돈이 있어도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을.


“정말 그래요.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도 의좋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야요.”


아내가 남편의 뜻에 공감하자, 남편은 득의양양해진다. 그러나 처형이 사준 신발을 보고 기쁜 내색을 보이는 아내를 본 남편의 마음에는 씁쓸함이 남는다. 그는 그제야 깨닫는다. 정신적 행복만으로는 삶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아내 역시 물질의 풍요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남편은 처음으로 이런 말을 꺼낸다.


“나도 어서 출세해서 비단신 한 켤레쯤은 사 주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이 말은 단순한 바람이나 변명이 아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부부가, 현실의 무게 속에서도 다시 사랑을 이어가려는 서툰 화해의 언어다.


「빈처」는 가난한 예술가와 그의 아내가 겪는 생활의 모순을 통해, 인간적 연민과 근대적 자의식이 교차하는 지점을 그려낸다. 경제적 무능 속에서도 자존심을 지키려는 남편, 현실의 무게 속에서도 사랑을 놓지 않는 아내. 결국 그들은 가난 속에서 사랑을 다시 배우는 사람들이다.


가난은 그들을 옥죄지만, 동시에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돈 때문에 싸우지만, 사실은 사랑이 돈보다 천해지지 않기를 지키려 싸운 것이다. 돈이 없어도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 그 마음이야말로 근대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인간을 인간답게 지켜주는 마지막 등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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