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독서록 39

남편이 돌아오기만 하면,

by 인상파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가람기획)


남편이 돌아오기만 하면,


대학 다닐 때 후문에 모여 있는 술집으로 술을 마시러 갈 때면, 우스갯소리로 ‘술 권하는 사회’라는 말을 들먹거리곤 했다. 뜻을 두고 무언가에 도전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졸업해도 별 볼 일 없는 과에 다니고 있어서 술이나 마시고 취하는 게 딱 좋은 그런 시간이 많았다. 객기에서 시작된 게 오기가 되고, 그 오기가 끝내 취기가 되어 술이 술을 부르고 사회가 술을 권한다는 말을 어쭙잖은 자조로 중얼거리던 기억이 있다.


〈술 권하는 사회〉를 다시 읽으면서, 술 마시는 쪽이 아니라 술 마신 사람을 기다리는 쪽의 마음에 더 가깝게 다가가게 된다. 결혼하고 남편을 멀리 떠나보내고, 시집살이를 하면서 거의 독수공방으로 세월을 보내는 아내의 처지가 되어 보는 것이다. 이광수, 채만식, 염상섭 등 일제 강점기의 작품에는 결혼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남편들이 유독 많았다. 조선의 아내를 두고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남편들은 그곳의 카페나 요리집을 드나들며 신여성과 어울리는 장면이 흔하다. 그들에겐 조선에 둔 아내가 점차 희미한 존재가 되어간다.


이 작품의 남편은 그런 외도는 하지 않는다. 공부로 전진한 남편과는 달리, 아내는 오로지 시집살이만 하며 6~7년의 세월을 보낸 탓에 두 사람 사이엔 건널 수 없는 지적 간극이 생긴다.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한이 모두 씻기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남편의 ‘공부’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신비한 것, 마치 도깨비의 부자 방망이처럼 모든 불행을 바꾸어 줄 힘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온 남편은 그 기대와 너무도 달랐다.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남의 돈벌이라도 하지만, 남편은 오히려 그 많은 공부를 하고도 집안의 돈을 쓰고 다녔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척하지만 실속이 없고, 점점 술에 빠져들었다. 조선 땅으로 돌아온 남편의 입장에서도 세상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울분이 없을 수 없었다. 모임이나 조직은 명예 싸움과 지위 다툼으로 얼룩졌고, 그는 “유위유망(有爲有望)한 머리를 알코올로 마비 아니 시킬 수 없다”는 말로 무능과 무기력을 술로 정당화한다.


그러니 공부한 남편이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 거라는 아내의 기대는 무너져 내린다. 배운 자의 말은 어렵고, 그 뜻은 아내에게 닿지 못한다. 그가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라고 말하자 아내는 ‘사회’를 요릿집 이름으로 알아듣는다. 이 짧은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의 세계는 완전히 분리된다. 남편은 지식을 무기로 삼고, 아내는 생활의 언어로만 세상을 이해한다.


결국 남편은 “그저 이 사회에서 할 것은 주정꾼 노릇밖에 없다.”며 자조하고, 아내는 “무슨 노릇을 못해서 주정꾼 노릇을 하느냐”고 받아치며 서로의 말이 닿지 않는 벽 앞에 선다. 남편은 “너 같은 숙맥더러 그런 말을 하는 내가 그르지.”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박차고 집을 나간다.


아내는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남편의 구둣소리를 들으며 모든 것을 잃은 듯 절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쑥한 얼굴을 경련적으로 떨며 절망한 어조로 소곤거린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마지막까지 이 작품은 아내의 무지를 남겨둠으로써 부부의 지적 간극의 골을 더욱 깊게 드러낸다. 남편은 유학을 통해 근대의 언어를 배웠지만, 그 언어로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내는 생활 속에서 몸으로 세상을 배웠지만, 그 마음을 표현할 말을 가지지 못한다. 한 사람은 말이 많지만 마음이 없고,한 사람은 마음이 깊지만 말이 없다. 이렇게 서로의 언어와 감정이 엇갈린 부부의 모습은 식민지 근대가 사람들에게 ‘배운 말’을 주는 대신 ‘통하는 마음’을 빼앗아간 시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식과 사랑, 말과 마음이 서로를 가로질러 닿지 못한 채 흩어지는 이 결말은 섬세하고도 슬픈 인간 단절의 장면이라 할 것이다.


그래도 아내는 과거 몇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새벽부터 집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여전히 기다릴 것이다. 남편이 돌아오기만 하면, 자신의 삶은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걸고. 남편이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 믿었던 아내의 기다림은 불가능한 희망에 대한 기다림이었다. 이제 또다시 “남편이 돌아오기만 하면,” 하고 어떤 기대를 갖는다고 해도, 그것은 도달하지 못한 사랑과 이해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독서록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