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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42

따라지 목숨

by 인상파

김유정의 〈소낙비〉(창비)


따라지 목숨

김유정의 〈소낙비〉는 성실한 농민이 농사를 짓고도 빚에 허덕이게 되자 고향을 등지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노름 밑천을 마련하려 아내의 몸을 내맡기게 되는 이야기다. 절대적 빈곤 속에서 살아갈 방도가 없자 일확천금을 꿈꾸지만, 그 밑천이 아내의 성이라는 점에서 이미 인간의 존엄과 도덕이 무너진 농촌 현실이 드러난다. 피폐한 시대, 생존을 위해 타락을 감수해야 하는 인간들의 초라한 삶이 이 작품의 중심에 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내용임에도 작품의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사물에 대한 판단이 미숙한 어수룩하고 순박한 인물들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김유정 문학의 힘은 바로 그 어두움 속의 웃음, 비극 속의 해학에 있다. 궁핍한 농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라도 살아갈 길을 찾아보려는 이들의 이야기는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세상에 나왔다.


발표 당시 제목은 ‘따라지 목숨’이었다. ‘따라지’란 보잘것없거나 하찮은 처지의 사람, 곧 주류에서 밀려난 잉여적 존재를 뜻한다. 개명된 제목 〈소낙비〉는 춘호 처가 쇠돌 엄마 집에 들어서기 직전 내린 폭우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욕망과 타락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상징적 순간이다. 폭우로 인해 춘호 처와 이주사의 관계가 성사되었으니, 날씨와 성적 이미지가 겹쳐진 셈이다. 실제로 그날 쏟아진 비는 오후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내리 내렸으니, 한바탕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라 삶 전체를 뒤흔드는 폭우였다.

돈 나올 구석이라고는 도대체 없는 집구석에서 저녁으로 먹을 감자를 씻고 있는 아내에게 춘호는 돈 2원을 얻어달라고 볶는다. 그 돈으로 노름 밑천을 마련해 투전장에서 한몫 잡고 서울로 떠나려는 것이다. 고향에서 해를 이어 흉작이 들어 농사로는 살아갈 수 없자, 빚쟁이들의 위협을 피해 아내와 함께 야반도주한 지 3년. 그러나 떠돌며 들어온 산골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농토도, 일자리도 없는 삶. 춘호는 “피폐하여 가는 농민 사이를 감도는 엉뚱한 투기심”에 몸이 달아 있다.

남편의 돈 구해오라는 성화에 아내가 떠올릴 수 있는 곳은 쇠돌 엄마뿐이다. 동네 부자 이주사와 관계를 맺은 뒤로 살림이 핀 여자. 그런 여자를 아내는 미워하면서도 부러워한다. 자신도 지난봄, 춘호가 집을 비운 사이 이주사가 범하려 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놀라 소스라치자 달아났던 그날 이후, 마음 한켠에는 두려움과 묘한 미련이 뒤섞여 남았다.


춘호 처가 발걸음을 옮겨 쇠돌 엄마 집에 당도하기도 전에 하늘을 덮은 검은 구름은 이내 폭우로 변한다. 그녀가 길가 밤나무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빗속을 뚫고 이주사가 쇠돌 엄마 집을 제 집인 양 밀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춘호 처는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쇠돌 엄마 집으로 들어서고, 이주사는 제 발로 찾아온 여자를 그냥 보낼 리 없다. 밖에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폭우’가 쏟아진다.


이후 이주사는 춘호 처에게 남편에게 농토를 주겠다, 첩이 되어 달라, 다음 날 같은 시간에 쇠돌 엄마 집으로 오면 돈 2원을 주겠다고 속삭인다. 그러자 춘호 처는 이주사가 그저 은인처럼 여겨지고 고맙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남편에게 돈 2원을 갖다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지지만, 그 일이 들통날까 두려워 애가 탄다.


“다만 애 켜이는 것은 자기의 행실이 만약 남편에게 발각되는 나절에는 대매에 맞아 죽을 것이다. 그는 일변 기뻐하며 일변 애를 태우며 자기 집을 향하여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을 가분가분 내리달았다.”

춘호 처의 걱정과는 달리, 춘호는 아내가 돈 2원을 내일 구할 수 있다는 말에 그 출처를 묻지 않는다. 아내의 매춘을 알고도 묵인한 것이다. 그는 감자를 삶으며 아내를 맞이하고, 그날 저녁은 오랜만에 화목했다. 그런데 그에게, 또는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생존과 생활 앞에서 도덕이란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감자를 삶는 남편의 다정함에는 오히려 생존 본능의 온기마저 느껴진다.


돈을 얻을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일까. 춘호 부부는 그날 밤 서울 이야기를 나눈다. 서울바람 한 번 쐰 춘호는 시골뜨기 아내가 서울에서 놀림받지 않게 사투리를 쓰지 말라 하고, 화장도 배우라 하며 설교를 늘어놓는다. 이튿날 줄기차게 내린 비는 아침이 되어서야 그치고 점심 무렵 볕이 든다. 춘호는 아내의 머리를 빗겨주고, 정성껏 삼은 짚신을 신겨 이주사에게 보낸다. 아내가 돈 2원을 얻어올 생각에 들떠서.

아내의 몸으로 먹고 사는 남편은 김동인의 〈감자〉에도 나온다. 복녀가 송충이를 잡으며 얼굴 반반한 아낙들이 일하지 않고 더 쉽게 돈을 버는 걸 부러워했던 것처럼, 이 작품의 춘호 처 역시 하루 종일 산나물을 캐거나 방아를 찧어 얻은 보리밥으로 연명하면서, 편하게 사는 쇠돌 엄마를 부러워한다. 두 작품은 절대적 빈곤이 도덕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타락은 어느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가난이 만들어낸 생활 방식이다.

그럼에도 김유정은 이들의 죄를 단죄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그들이 살아 있는 인간으로 남으려 애쓰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다. 웃음과 눈물이 함께 묻어나는 문장 속에서 독자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또 얼마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지를 본다. 비가 그치고 볕이 비추는 결말은 희망이라기보다 그저 생존의 힘에 더 가깝다. 작품이 말하고자 한 것은 타락이나 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살아 있으려는 인간의 본능, 배고픔과 욕망에 충실한 이들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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