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윤리의 불길 사이에서
김동인의 「광염소나타」 (리베르)
예술과 윤리의 불길 사이에서
김동인의 작품은 자극적이어서 학창시절 읽은 이후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 「감자」 「배따라기」 「광염소나타」 「광화사」 등이 그렇다. 그의 작품들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불편한 느낌이 있다. 보통 사람들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고 할까.
「감자」의 복녀는 매음을 하고, 「배따라기」에서는 오해로 밝혀지기는 해도 시동생과 상관을 한다는 아내가 나오며, 「광염소나타」와 「광화사」에서는 예술을 한답시고 방화를 하거나 살인을 저지른다. 특히 후자의 두 작품을 읽고는 어린 마음이 적잖게 혼란을 겪었다. 작품은 예술지상주의랍시고 그들의 천재적인 예술 기를 위해서라면 살인과 방화 정도는 용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광염소나타」는 지금 읽어도 여전히 불편하고 불쾌하다.
이 작품은 2개의 액자 틀을 가지고 있다. 도입부에서 ‘나’라는 화자가 백성수 이야기가 허구임을 내세우며 음악비평가 K와 사회교화자 모씨의 대화를 소개하고 있고, 음악 비평가 K는 백성수로부터 받은 편지로 성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소 복잡한 형식을 취한 이 작품은 도입부에서 시공간을 달리하여 백성수 같은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임을 전제한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이 옹호하는 예술관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작품의 제목 ‘광염소나타’에서 ‘광염’은 미친 불꽃을 뜻한다. 천재음악가 백성수는 원한의 방화를 저지르고, 그 미친 불길에서 받은 감흥을 피아노로 즉흥적으로 쏟아내어 작곡한다. 그 작품의 이름이 바로 ‘광염소나타’다. 이후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이 곳곳에 솟는데, 그것은 대부분 백성수의 짓이었다. 그는 그렇게 이유 없이 방화를 저지르고, 그 감흥으로 또 다른 곡을 만든다. ‘성난 파도’도 그중 하나다. 방화가 잦아지자 그 감흥조차 시들해진 그는 더 잔인하고 끔찍한 행각을 벌이며, 그때마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음악을 만들어 낸다. 길가의 시체를 훼손하고는 ‘피의 선율’을, 무덤 속 시체를 꺼내 간음하고는 ‘사령(死靈)’이라는 곡을 작곡한다. 그것도 부족하여 마침내 살인을 저지른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지만, 예술가협회의 구명운동으로 정신병자로 분류되어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백성수는 타고나기를 아버지의 음악적 천재성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나, 가난과 불행한 환경은 그 재능을 뒤틀어놓았다. 중학교 졸업 후 공장에서 일하며 음악을 향한 열정을 품었지만, 어머니의 병으로 모아둔 돈을 모두 잃고, 마지막에는 절망 끝에 담배 가게 돈을 훔쳤다가 감옥에 가게 된다. 그 사이 어머니는 길에서 돌아가셨고, 무덤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세상의 냉정함이 그의 마음에 무서운 불을 지폈다. 그렇게 원한의 방화와 함께 그의 범죄본능과 음악적 천재성이 동시에 깨어난다.
그의 재능을 세상에 드러낸 이는 음악비평가 K였다. 우연히 교회에서 만난 백성수의 즉흥 연주를 듣고 그는 전율을 느낀다. 백성수의 음악을 ‘베토벤 이래로 근대 음악가에게서 보지 못하던 광포스런 야성’이라 극찬하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방 하나를 내준다. 그 방의 묘사는 백성수의 불안한 내면과 닮아 있다.
“그 뒤에 선생님께서 저를 위하여 꾸며주신 방도 또한 제 마음에 가장 맞는 방이었습니다. 널따란 북향 방에 동남쪽 귀에 든든한 참나무 침대가 하나, 서북쪽 귀에 아무 장식 없는 참나무 책상과 의자, 피아노가 하나씩, 그밖에는 방 안에 장식이라고는 서남쪽 벽에 커다란 거울이 하나 있을 뿐, 덩더렇게 넓은 방은 사실 밤에 전등 아래 앉아 있노라면 저절로 소름이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방이었습니다. 게다가 방 안은 모두 꺼먼 칠을 하고, 창밖에 늙은 홰나무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는 것도 과연 귀기가 돌았습니다.”
비평가 K는 백성수의 창작욕을 자극하기 위해 방 안을 의도적으로 음침하게 꾸몄다. 천재 음악가의 광기를 부추기며, 그가 ‘힘 있는 예술’을 만들어내길 바랐던 것이다. 백성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마다 극도의 초조감과 죄책감에 시달렸고, 결국 다시 방화로 손을 뻗었다. 범죄가 반복될수록 음악은 더 강렬해졌고, 그의 영혼은 점점 파괴되어 갔다.
그의 엽기적인 행각은 결국 K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드러난다. 비평가 K는 사회교화자 모씨와의 대화를 통해 백성수의 범죄를 예술과 분리하려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에게는 이것이 쓸쓸해요. 힘 있는 예술, 선이 굵은 예술, 야성으로 충일된 예술……,우리는 이것을 기다린 지 오래됐습니다. 그럴 때에, 백성수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말이지 백성수의 그 새 예술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문화를 영구히 빛낼 보물입니다. 우리 문화의 기념탑입니다. 방화? 살인? 변변치 않은 집개, 변변치 않은 사람개는 그의 예술 하나가 산출되는데 희생하라면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섬뜩하다. 예술을 절대화한 나머지 인간의 생명을 ‘희생해도 아깝지 않다’고 말하는 비평가는, 예술의 이름으로 가장 비윤리적인 논리를 정당화한다. 김동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의 순수성과 인간의 윤리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광염소나타」와 같은 주제의식을 지닌 「광화사」의 솔거 또한 복수심과 예술적 집착으로 소경 처녀를 희생시킨다.
예술을 위해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타인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예술이란 무엇이고, 그 예술이 목적으로 하고 있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생명에도 등급이 있는가. 어떤 생명은 예술가를 위해 죽어도 좋고, 예술가라는 작자는 예술을 위해 다른 목숨을 수단시해도 좋은가.
방화, 시체 훼손, 시간, 살인 같은 것을 하고 난 후의 광포한 야성으로 예술을 하는 것을 어찌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그런 작품은 자기만이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세상에 나올까 말까 한 걸작이라고 추켜세우는 비평가의 예술관에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탐미주의, 유미주의 소설이라고 하는 이 작품에서 비평가 K가 던진 질문에 대한 명징한 답은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아름다움인지에 대한 물음을 시작할 때에 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음악을 생산한다고 해도 그것이 범죄와 연결된다면 그것은 작품이 아니라 그저 범죄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