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통과해 삶을 이해하다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흐름출판)
죽음을 통과해 삶을 이해하다
삶을 오래 살아본 사람이라도 ‘죽음’을 진심으로 생각해 본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늘 그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모른 채 살아간다. 죽음은 언제나 막연한 미래의 일로 밀어두고, 오늘의 일상에 파묻혀 그것을 잊으려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예고 없이 그 시간이 찾아온다면 사람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혹은 종교적 낙관에 매달려 현실을 외면하기도 한다. 그 어느 쪽도 완전한 해답은 아니다. 영국의 시인 브루크 풀크 그레빌은 오래전부터 인간이 이 모순된 감정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라.”
죽음을 두려움이 아니라 통과의 문으로 보는 그의 시선은, 《숨결이 바람 될 때》를 관통하는 정신과 맞닿아 있다. 책의 맨 서두에 실린 시는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전도유망한 신경외과 의사였던 폴 칼라니티는 서른다섯에 폐암 진단을 받고 일 년 후 세상을 뜬다. 그는 한순간 생명을 다루던 의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로 바뀌었다.
병을 알고 나서도 그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냉정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에는오히려 깊은 정신적 품위가 느껴졌다. 아마도 생과 사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며 환자의 마지막을 지켜본 의사라는 직업이 그를 단련시킨 덕분이었까. 그는 자신의 병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치료 계획을 세우고, 변해가는 몸의 반응을 기록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원망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 있음’으로 채워가려는 의지로 맞이했다. 죽음이 점점 조여 왔을 때, 그라고 해서 두려움과 고통이 없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는 그 두려움 속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순간에 함께하며, 삶의 마지막까지 의미를 창조하는 일에 동참했다.
그에게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이해의 완성이었다. 생명을 다루던 의사에서,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응시하는 인간으로 변모했다. 죽음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의미를 가장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그레빌의 시구,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처럼 그는 이제 우리가 부를 수 없는 새로운 이름으로 존재한다. 의사도, 환자도, 남편도, 아빠도 아닌, 한 인간의 숨결로 남아 바람이 되어 흐르는 존재가 되었다.
‘죽음이 삶을 완성시킨다’는 말에 여전히 쉽게 동의하기는 어렵다. 죽음은 단절이고, 끝이며, 더 이상 ‘생’과 함께할 수 없는 비가역의 시간이다.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서 생각해 보면, 고통의 절정을 지나 자신의 소멸을 받아들이는 일이 어찌 완성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생의 끝자락에 또 다른 시작이 있으리라 믿는다. 어쩌면 그 믿음이야말로 인간이 절망을 견디는 가장 본능적이고 아름다운 방식일 것이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그런 복잡한 생각 속에 놓인 독자에게 대답을 건네는 것 같다. 죽음을 두려움으로만 보던 시선을 바꾸어, 그것이 삶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아채라고. 숨결이 바람으로 이어지면 인간은 비로소 삶의 본질에 닿는다는 것을.
죽음은 생의 반대편이 아니라, 삶이 빛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어둠이다.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오래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깊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물어야 함을 알게 된다. ‘숨결’이 멈추는 건 죽음이지만, 그 숨결은 ‘바람’이라는 존재의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 저자의 마지막 숨은 끝이 아니라, 그의 책을 읽는 이들의 마음에 닿아 새로운 ‘바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