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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48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믐달

by 인상파

나도향의 「그믐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믐달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나도향의 「그믐달」은 인간의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얼굴을 비춘 작품이다. 그의 ‘그믐달’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요염과 원부와 청상이다. 그런데 이 세 조합의 색조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만 같다. 하늘의 그믐달이라면 형체도 없는, 그저 캄캄한 밤으로 인식되곤 했기에 그처럼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사람을 홀릴 만큼 아리땁다는 요염이 원한과 죽음을 품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역설에 어느 정도 마음이 끌리는 것도 사실이다.


나도향은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 작가다. 그는 여자로 태어난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여자, 그것도 그믐달 같은 여자라니. 나는 작가와 달리 남자로 태어났으면 했다.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구속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여자인 나로 태어난 것도 괜찮았던 것 같다. 나이 오십을 넘겨서야 내 존재를 조금씩 수용하고 있으니, 이 또한 그믐달의 빛 아래서 가능한 깨달음인지도 모른다.


스물넷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그에게, 그믐달은 어떤 달이기에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에게 그믐달은 한 가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요염한 달이면서, 원부(怨婦)와 같고, 애인을 잃은 공주와 같으며, 머리 풀고 우는 청상(靑孀)과 같은 달이다. 상실의 달이고 한의 달이고 슬픔의 달이다. 그믐달은 한 가지 정조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감정의 달이다.


요염한 달, 그믐달. 달이 요염하다니, 달은 고요하거나 쓸쓸한 존재이지, 요염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작가의 심미적 감수성을 따라가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향이 말한 ‘요염’은 단순한 미모나 유혹이 아니었다. 사라지기 직전의 빛이 내뿜는 마지막 매혹, 즉 스러짐 속의 생의 기운을 요염이라 불렀던 게 아닐까. 그 빛은 손에 잡히지 않고, 다가가면 이미 사라지는 듯하여 애절하고 절절하다. 그믐달의 요염은 다가서지 못하는 거리감에서 비롯된 가슴 저린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그믐달은 동시에 원부와 같다. 세상의 풍상을 다 겪은 여인, 사라짐의 운명을 안고도 마지막까지 빛을 품은 존재. 그런데 원부의 ‘원’(怨)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릴 만큼 독하여 그믐의 정서와는 어딘가 어긋나 보인다. 그믐달은 분노보다는 슬픔에 가깝고, 응어리진 증오보다는 체념과 이해의 온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향이 그믐달을 원부에 빗댄 이유는 원한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깊이에 있다.


모든 원은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사랑이 깊을수록 미움은 짙고, 그 미움이 다하면 남는 것은 허무와 연민뿐이다. 그믐달은 바로 그 지점, 모든 감정이 다 소진된 자리에서 피어나는 마지막 인간적 온기를 상징한다. 그래서 나도향의 원부는 서리를 내리는 여인이 아니라, 세상의 한기를 대신 품어주는 여인이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 생이 저물어가는 자리에 남은 잔열 같은 감정. 그 속에서 나도향은 슬픔과 이해가 하나로 녹아드는 얼굴을 본 것이다. 그에게서 나도향은 인간의 덧없음을 보았고, 그 덧없음 속에서 오히려 인간적인 빛을 발견했다. 그믐달, 이제 아주 어둠 속으로 묻혀갈 달이 아닌가. 요염함은 그 빛의 표면이고, 비절함은 그 깊은 속살이다.


하지만 그런 그믐달을 보는 이는 많지 않다. 그래서 그믐달은 언제나 외로운 달이다. 둥근 달이 축복과 풍요의 상징이라면, 그믐달은 결핍과 그리움의 상징이다. 그믐달을 보는 이는 님을 그리워하는 사람, 한을 품은 사람, 혹은 외로움을 견디는 사람이다. 때로는 술주정꾼이나 노름꾼, 도둑처럼 밤의 끝에서 방황하는 이들만이 그 달을 본다. 낮의 질서에서 밀려난 그들에게 그믐달은, 세상이 잠든 뒤에도 깨어 있는 마지막 희망의 빛이 아니었을까.


작가가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고백했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은 〈벙어리 삼룡이〉에 나오는 주인집 젊은 아가씨였다. 아가씨의 삶은 처음부터 그믐달의 빛을 닮았다. 그녀는 사랑받지 못한 아내로서, 남편의 학대와 냉대 속에 살아간다. 그 모습은 나도향이 말한 ‘원부의 달’과 다르지 않다. 남편에게 모욕당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으면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못한 채 조용히 견디는 여인.


그녀는 빛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오히려 더 고운 슬픔을 품는다. 그믐달이 그렇듯, 그녀 또한 사라지지 못한 사람, 그러나 다시 빛나지도 못할 사람이었다. 그녀가 벙어리 삼룡이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연민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는 짐승 취급을 받은 삼룡이 안에서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말을 잃은 사내와, 목소리를 닫은 여인. 둘은 서로의 침묵을 알아보며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존재끼리의 동질감으로 이어진다. 말은 없어도 표정과 몸짓으로 위로하고 위로받는 인간적 연대를 이룬다. 아가씨는 삼룡이에게 하늘의 그믐달처럼, 한 줄기 미약한 빛으로나마 어둠을 밝혀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빛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불길 속에 뛰어든 삼룡이가 죽자, 그녀의 생은 이미 과거의 그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았으되, 마음은 이미 죽은 자의 곁에 머물렀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믐달처럼 차고 고요한 빛이 남아 있었을 터. 그 빛은 요염하면서도 쓸쓸하고, 비절하면서도 따뜻했을 것이다. 그녀는 죽은 이를 품은 채 서서히 사라져가는 그믐달이 되었을 것이다. 삶의 고통과 죽음의 고요 사이에서 끝내 놓지 않는 연민의 빛이 되었을 것이다.


그믐달은 또한, 정 있는 사람, 한 있는 사람, 심지어 무정하고 무서운 사람까지도 다 품는다. 이 말은 그믐달이 단지 슬픈 달이 아니라, 이해와 용서의 달임을 뜻한다. 모든 인간의 모순과 허물을 다 본 뒤에도 끝내 미워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봐주는 달. 그러니 어느 누군들 그믐달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겠는가. 그 젊은 나이에 이미 한이 깊었던 나도향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었다는 말은 세상의 어둠을 껴안고도, 마지막까지 사라지지 않는 연민의 빛으로 남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말이었을 터.


지금은 그가 말한 그믐달이 하늘의 달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 있는 마음의 빛으로 느껴진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세상의 허물을 품어내는 힘. 그것이 어쩌면 나도향이 남긴 문학의 진짜 얼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믐달의 얼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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