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만든 욕망과 철들지 않는 인간
김유정의 「솥」(김유정 기념 사업회)
가난이 만든 욕망과 철들지 않는 인간
나는 가끔 모든 대중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가웃거리곤 한다. 궁핍과 생존에 매달린 많은 민초들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사람 구실을 못하고 망나니처럼 구는 걸 보면서 자라왔다. 어릴 적 시골에서 아버지 되는 사람들이 술과 노름에 취해 저녁 늦게 집에 들어와 아내를 패고 아이들을 들볶고 끝내는 차려놓은 밥상을 마당으로 내던지는 그런 꼴들을 목격하곤 했다. 술과 노름을 권하는 사회의 희생물이었던 것일까. 그 시대의 남편이자 아버지 되는 사람이.
어린 나이에도 어른이 어른 같지 않은 것을 목도하곤 사람의 철듦에 대해 생각하곤 했던 것 같다. 나이를 먹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산다고 하여도 사람은 저절로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는 걸 알아채 버린 것이다. 김유정의 「솥」은 철들지 못한 인간의 민낯을 보여준다. 가난한 살림 속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근식이는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감당하기보다 술과 들병이 여자 계숙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결국 집안의 마지막 생계 수단인 ‘솥’까지 빼돌리고 만다.
성장해야 할 자리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도망쳐야 할 현실 앞에서 도망쳐 보지도 못한 사람. 김유정이 그리는 인물은 바로 그런 어른의 모습을 하고도 철들지 못한 인간이다. 근식이의 욕망은 크지 않다. 그저 돈 걱정 없이 술 좀 마시고, 여자에게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게 막연한 꿈이다. 그러나 그조차 실행되지 못한다. 아내의 속곳이며 맷돌, 함지박 같은 부엌 살림살이를 내다 술을 먹고 아내 몰래 들병이를 따라가 살림을 차리려 하지만 좌절된다.
그것은 여자의 벌이로 편히 살아가려는 작자가 근식이뿐이 아니기 때문이다. 들병이 남편은 “술만 처먹고 노름질에다 후딱하면 안해를 두들겨패고 벌은 돈푼을 뺏어가셔 함으로써 당최 견딜 수가 없어 석달 전에 갈렸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근식이가 들병이와 떠나려는 밤에 다시 들병이를 찾아들어 온 것이다. 들병이가 근식이와 함께 누운 방 한구석에서 제 남편을 발견하고 ‘몹시 경풍을 하고 고개를 접더니 입을 꼭 봉하고 잠잠히 있’는 걸 보면 둘이 계획적으로 벌인 것 같지는 않다.
들병이 남편이 근식이와 아내 사이에 있었을 부정에 대해서도 어떤 분노도 일이키지 않고 그저 우는 아이나 달래면서 끝내는 근식이에게 함께 떠나기를 재촉하는데 그런 그의 모습을 “마치 제가 주장하여 둘을 데리고 먼길이나 떠나는 듯 싶다.”말하고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렇다. 제 한 몸 편하게 살려드는데 그깟 여자의 부정이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오히려 그로 인해 살림을 장만했으니 감사할 노릇이지. 산모퉁이 언덕길에 늘어선 아이를 업고 나선 들병이와 살림살이를 지고 가는 들병이 남편, 그리고 그들 꽁무니를 따라가는 근식. 이들을 보고 솥을 찾으러 쫓아오는 근식 아내. 그들을 구경삼아 목을 내빼고 있는 산골 사람들. 정말 대단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근식이는 아내가 쫓아오지 않았다면 들병이 부부를 정말로 따라나서려고 한 걸까. 근식이는 안해가 “분에 복받치어 고만 눈위에 털썩 주저앉아며 체면 모르고 울음”을 놓을 때 창피한 것은 알았던지 구경꾼들에게 시선을 흘깃거리며 “아니야 글쎄, 우리것이 아니라니깐 그러네 참!”하며 제 손으로 빼간 솥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늘어놓으며 울상을 짓는다. 근식이가 아내와 달리 들병이 여자의 벌이로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아보자고 한 것은 들병이가 아내보다 대단한 능력을 가져서가 아니다.
4년 전 결혼한 아내와의 정은 이미 바닥났다. 근식이에게 아내는 더 이상 삶을 함께 꾸려갈 동반자가 아니다. 가난과 고단함 속에서 닦인 인내와 희생은 보이지 않고, 그저 노래 한 자락 부르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로만 비친다. 근식이는 아내를 가난의 무게로만 바라보며 스스로 책임 지려 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들병이 계숙이는 근식이 눈에 가난에서 벗어난 듯한 자유의 기운으로 보인다. 뭇남성의 품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삶은 도덕의 잣대로 보자면 천한 일이지만, 근식이에게 그것은 오히려 능숙한 생존술이고, 힘들이지 않고도 먹고 사는 영리함처럼 비친다. 그녀가 남자들을 좌지우지하며 웃어넘기는 모습 속에서 근식이는 부러움과 막연한 동경을 품는다.
근식이가 계숙이에게 끌리는 까닭은 그녀가 더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현실의 무게에서 도망치고 싶어서다. 가난을 타개할 능력 없이 다만 쉽게 살아보려는 허황된 기대가 그를 움직인다. 결국 근식이의 마음에는 무능이 만든 도피심과 가벼운 욕망이 자리할 뿐이다. 남에게 기대어 살아보려는 생각에 흔들리고,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김유정의 인물들은 욕망을 품지만 그 욕망은 끝내 현실에 흡수된다. 그저 살아본다는 본능이, 사람을 어리석고 비루하게 만든다. 세속적 욕망과 생존의 무게 안에서 그들이 철이 든다는 것은, 너무 먼 이야기다. 김유정은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가난이 인간을 어떻게 비틀고, 욕망이 인간을 어떻게 허물고, 그러면서도 삶은 어떻게 계속되는지를. 웃음과 비애가 섞인 이 세계에서 근식이의 도주 실패는 비극이 아니라 그저 살아 있는 자의 모습일 뿐이다. 나약하고 비루하고, 그래서 더욱 인간적인.
근식이는 철들 기회를 놓친 사람이 아니라, 철들 시간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의 비루한 욕망조차 가난이 빼앗았다. 그렇게 「솥」은 가난한 인간에게 욕망이란 세상을 바꿀 힘이 아니라, 잠깐 취한 김에 큰소리 한번 치고 다음 날이면 허기를 안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덧없는 몸부림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꿈을 꾸는 순간만큼은 우습게 커 보이지만, 현실 앞에서 무너질 때는 가엾도록 작아지는 욕망. 그 욕망이 부풀어 오를 때는 희극이 되고, 스러질 때는 비극이 된다.
가난한 사람의 욕망은 우습지만, 그 우스움 안에 인간의 진실이 깃들어 있다. 사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도덕도 체면도, 살아가려는 생존 앞에서는 그리 단단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저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맞이하며, 때로는 어리석고 때로는 비굴하게, 그러나 끝내 삶에서 물러서지 않는 마음.
「솥」 속 인물들은 철이 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철들 기회조차 없이 삶에 떠밀려온 사람들이다. 그들의 웃음이 천박해 보여도, 그 웃음 속에 스민 눈물이 사람을 오래 붙든다. 결국 우리는 그들을 비웃으며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살아낸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체면이요, 겨우 붙든 희망이었음을 문득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