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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54

그림자처럼 스쳐간 사람

by 인상파

김유정의 <산골 나그네>(김유정기념사업회)

그림자처럼 스쳐간 사람


‘산골 나그네’라는 말에는 정겨움과 그리움이 가득하다. 어딘가로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 그 나그네가 다른 곳도 아닌 산골에 깃들었다는 건 얼마나 운치 있는 말인가. 그렇다. 김유정의 <산골 나그네>는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악다구니나 비루한 인생의 굴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보다는, 그 속에 따뜻한 숨결이 남아 있는 이야기다. 가난과 욕망, 어쩔 수 없는 인간사의 구렁텅이를 벗어나지는 않지만, 이 작품에는 골 깊은 비극 대신 잠시나마 쉬어가는 숨과 들풀 같은 온기가 느껴진다. 산길을 따라 흘러가는 산바람처럼 인물들은 크게 울지도, 소리치지도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발걸음에 실어 나르는, 소박한 삶의 결이 배어 있다.

야심한 밤, 마을과 동떨어진 산골 주막에 허름한 옷차림의 색시가 하룻밤을 청한다. 가을걷이가 끝난 철인데도 술 마실 장정이 뚝 끊겼고, 아들 덕돌이와 함께 주막을 꾸리는 주인 마누라의 마음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런 차에 나그네가 찾아들었으니 반갑기까지 하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색시는 곧 길을 떠나려 하지만, 주인 마누라는 며칠 더 머물다 가라 붙잡는다. 색시가 주막에 들었다는 소문이 돌자 이튿날부터 술꾼들이 모여들고, 남정네들의 희롱 섞인 눈길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색시는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묵묵히 거친 손길을 견딘다.

주인 마누라는 이내 색시에게 마음을 붙이며 딸 삼아 살고 싶다는 소망까지 품는다. 마침 혼사까지 틀어져 속만 태우던 덕돌이는, 살림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 굶기지는 않겠다며 느닷없이 청혼을 하고, 색시는 군말 없이 그의 아내가 된다. 주인 마누라와도 더없이 다정하게 지내며 덕돌이와의 새살림도 조용히 정을 쌓는다.

그러나 어느 깊은 밤, 덕돌이가 잠든 사이 색시는 그의 옷을 챙겨 사라진다. 값나가는 은비녀는 이불 속에 그대로 둔 채. 결말에 이르러 비로소 밝혀지는 내막은, 남편이 없다던 색시에게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물레방앗간에 그 남편이 병들어 누워 있었다. 덕돌이와 사람들이 뒤쫓자, 그녀는 남편을 부축하고 황급히 산길로 달아난다. 그들은 어떤 설명이나 해명 없이 바람에 쓸려가듯 사라진다.

이야기는 그렇게 조용히 끝나지만, 한 가지 의문이 강하게 남는다. 그 나그네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키려 했던가. 제 살길을 찾았다면 남편을 버리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덕돌이와 결혼까지 했으니 병든 남편을 버리고 산골에서 그럭저럭 살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주막의 따뜻한 밥과 사람들 사이의 온기, 덕돌이의 순하고 욕심 없는 마음은 그녀에게 잠시나마 ‘머물고 싶은 자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김유정의 작품에서 보기 드문 신의라고 할까, 책임 혹은 부부의 도리를 끝내 놓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관습적인 의무였는지, 아니면 가난한 이들이 서로의 목숨을 의지해 붙들 수밖에 없는 마지막 끈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편안함과 새 삶의 가능성을 등지고, 병든 남편의 몸을 부축하며 다시 길 위로 나섰다는 사실이다. 그 선택은 비극이라기보다 묵묵한 체념, 그리고 아주 작은 존엄의 빛을 품고 있다.

비극이라 부르기엔 너무 조용하고, 희극이라 웃기엔 너무 쓸쓸하다. 그들의 떠남에는 울부짖음도, 피 눈물도 없다. 누가 죽은 것도, 천지가 흔들릴 만한 사건이 벌어진 것도 아니다. 그저 한밤중 덕돌이의 헐렁한 옷 한 벌을 들고, 몸이 성치 않은 남편을 부축해 산길을 서둘러 내려갈 뿐이다. 결말은 삶처럼 흐리고 그 흐림 속에 오히려 인간의 진실이 비친다. 울 만한 일도, 웃을 만한 일도 아닌, 그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길이 있을 뿐이다.


그들의 사연은 끝내 다 말해지지 않고, 어쩌면 말해질 수도 없다. 김유정은 그저 산골이라는 고요한 무대 위에, 스쳐 지나가는 인간의 생과 애환을 덤덤히 놓아둘 뿐이다. 그림자처럼 왔다가 그림자처럼 사라진 두 사람. 그들의 가난은 죄가 아니었고, 떠남은 배신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서로를 놓지 않으려는 마지막 정, 그 정을 지키기 위해 산골을 등진 슬픈 발걸음만이 남는다. 남겨진 덕돌이와 사람들은 허탈해하지만, 독자는 나그네의 뒷모습에 작은 연민을 얹는다. 비록 스친 삶일망정 그 덧없음 속에서 인간이 지닌 슬픔과 온기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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