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미로운 통증, 그것은 사랑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민음사)
감미로운 통증, 그것은 사랑
이 작품은 18살 여고생 숙희가 어머니의 재혼으로 22살 대학생 의붓오빠 현규에게 이성의 감정을 느끼며 겪는 갈등을 그린다. 강신재 작품 속 여성 주인공들은 대체로 경제적으로 넉넉한 환경을 지니고 있으며, 이 작품 역시 생활고가 연애의 걸림돌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 감정이 불러오는 불확실함과 불안, 흔들림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숙희의 생부는 오래전부터 어머니와 별거하다 재회 없이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는 부모의 강요로 숙희의 아버지와 결혼했으나, 혼자가 된 뒤 결혼 전 연인이었던 무슈 리와 재혼한다. 사랑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 가정을 꾸렸으니, 그들의 자녀인 숙희와 현규 사이에 작은 불꽃이 일지 않았을 리 없다.
“V넥의 다갈색 스웨터를 입고 그보다 엷은 빛깔의 셔츠 깃을 내보인 그는, 짙은 눈썹과 미간 언저리에 약간 위압적인 느낌을 갖고 있었으나 큰 두 눈은 서늘해 보였고, 날카로움과 동시에 자신에서 오는 너그러움, 침착함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듯해 보였다. 전체의 윤곽이 단정하면서도 억세고, 강렬한 성격의 사람일 것 같았다. 다만 턱과 목 언저리의 선이 부드럽고 델리킷하여 보였다.”
숙희가 처음 마주한 현규의 모습이다. 단정하면서도 강하고,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얼굴. 가족보다 먼저 한 남자로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한집에서 지내며 호감은 이성적 감정으로 빠르게 자란다. 숙희에게 ‘오빠’라는 호칭은 단순한 가족 관계가 아니라,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 같은 어휘”일 뿐이다.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자리에서 시작된 사랑은 더욱 뜨겁고 서투르다.
더욱이 이것은 숙희만의 감정이 아니다. 현규 또한 오빠라는 얼굴 뒤에 감춰진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 숙희는 ‘미스 E여고’에 뽑힐 만큼 아름답고, 두 사람의 미묘한 동요는 서서히 소유와 열망으로 번져간다.
“나는 그를 영원히 아무에게도 주기 싫다. 그리고 나 자신을 다른 누구에게 바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우리를 비끄러매는 형식이 결코 오누이라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을 알고 있다.”
가족과 연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숙희는 현규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 장관의 아들 지수가 보낸 연애편지를 일부러 눈에 띄게 둔다.
“어디 갔다 왔어?”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죽어도 말을 할까보냐고 생각했다.
별안간 그이 팔이 쳐들리더니 내 뺨에서 찰깍 소리가 났다.
화끈하고 불이 일었다. 대번에 눈물이 빙글 들었으나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오늘의 감각으로 보면 문제적 장면이다. 그러나 그 순간 숙희는 오히려 확신한다. 숨겨진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유혹이 만든 사건. 감정의 고백 대신 폭발한 질투가 그녀에게는 뜨거운 증거로 읽힌다.
“전류 같은 것이 내 몸속을 달렸다. 나는 깨달았다. 현규가 그처럼 자기를 잃은 까닭을. 부풀어 오르는 기쁨으로 내 가슴은 금방 터질 것 같았다. ……소리 내며 흐르는 환희의 분류가 내 몸속에서 조금도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사랑을 얻는 일은 때로 생을 얻는 일과 맞먹는다. 그러나 이 장면은 동시에 폭력을 애정으로 오해하는 위험한 감정의 순간이기도 하다. 풋풋함 뒤에 감미로운 불편함이 따라온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유지된 것은 어머니의 존재 덕분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미국에 머물게 되자 숙희의 감정은 더이상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불안과 열망 속에서 잠도 이루지 못한다.
“내 온 신경은 가엾은 상처처럼 어디를 조금만 건드려도 피를 흘렸다.”
금기와 욕망 사이에서 솟구친 감정은 상처처럼 민감하고 아렸다. 사랑은 설렘에서 고통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두려움으로 변해가며 숙희를 흔든다. 결국 숙희는 외할머니 댁으로 도망친다. 사랑이 그녀를 붙잡았고, 결국 사랑이 그녀를 떠나게 만든 것이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현규는 직접 찾아와 다른 제안을 한다. 어머니가 없는 동안 서로 떨어져 지내자고.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해 오히려 거리를 두자고 말한다. 나중에 외국에서 함께 살자는 약속까지 건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숙희는 젊은 느티나무를 끌어안고 환히 웃는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금기 위에 위태롭게 선 감정이 허락받은 듯한 순간이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라는 감각적인 첫 문장처럼 작품은 처음부터 향긋하고 풋풋한 사랑의 기운을 띤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향기 속에는 금기에 가까운 욕망이 잦은 숨을 몰아쉬며 숨어 있다. 마지막에 이르면 숙희의 독백 속에서 미래는 밝게 열려 있는 듯 보인다. 두 사람은 제도와 관습의 경계에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느티나무처럼 곧고 단단한 사랑을 키워갈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감미로운 설렘 속에 이미 통증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것을. 폭력을 애정의 증명으로 받아들이는 오해, ‘오빠’라는 명칭이 무너뜨린 경계,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될 수 있는 집착의 위험. 숙희가 느낀 환희는 분명 찬란했지만, 그것이 건강한 빛인지, 불꽃처럼 타오르다 스스로를 태우는 열기인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 사랑이 미숙하고 위험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한 시대 청춘의 뜨겁고도 덜 여문 마음이 만들어낸 통증이었다. 독자는 그들의 사랑이 옳았는지 판단하기보다, 한 소녀가 사랑을 통과하며 어른이 되어가는 순간을 함께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