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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30

오늘의 다짐

by 인상파

오늘의 다짐


우울하고 몸이 무겁다. 마음 한쪽이 스스로 빛을 끄는 날이다. 분명 어디엔가 빛이 있고, 따뜻함도 있을 텐데 오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눈보다 먼저 마음이 어둠을 택한다.


헛발질. 사소한 일조차 버겁다. 별일 아닌 일들이 별일이 되고 이 무게감이 양쪽에서 짓눌려오니 그럴 때면 가만히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몇 천 년을 살아버린 듯한 이 오래된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마음 안에 무덤을 파기 시작한다.

묻는다, 아니 묻어버린다. 버리지 못한 기억들, 내 안에서 썩지도 사라지지도 않은 감정들. 말라붙은 상처들이 아직도 나를 부른다.

살아 있다는 건 기쁨이 아니라 무언가를 계속 떠나보내며 버티는 일인지도 모른다. 가만히 지우고, 가만히 붙잡고, 그 둘 사이에서 흔들리는 일.

창고에 쑤셔박아 놓은 물건들을 꺼내듯 내 오래된 마음의 창고에서 낡고 바랜 마음을 꺼내 정리를 하려고 했더니 정작 손에 잡힌 게 하나도 없다.


무엇을 가득 채워놓고 산 줄 알았는데,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어지러웠으니, 정리하려고 문을 열어보니 텅 비어 있지도, 그렇다고 꽉 차 있지도 않은 애매한 빈자리들만 나를 맞는다.

쌓아두었다고 믿었던 감정들은 기억의 모서리에서 이미 오래전에 흩어졌고, 붙잡아 두려 했던 마음들은 먼지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무엇을 간직하고 싶었던 걸까. 무엇에 기대어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걸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저 지나간 날들이 층층이 쌓여 있을 뿐이다. 버릴 것도, 정리할 것도 모호한 마음의 창고.

그저 오늘의 마음을 조용히 놓아두는 것으로 정리의 첫 단계를 삼아야 할까. 채우고 비우는 일에 너무 애쓰지 말고 잠시, 그대로 둬봐야지.


언젠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그때의 나를 알아주는 추억 한 조각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만 남아 있어도 좋으니까. 그것이 나를 살리고 나를 살아가게 하는 그 무엇일 테니.


춥고 어두운 날, 마음도 함께 움츠러들지만 어딘가 깊은 곳에서는 아직 미약하게나마 숨 쉬는 온기가 있을 것이다.

사라져버린 것 같아도, 모든 게 무너진 듯 보여도 끝내 꺼지지 않은 불씨는 남아 있을 것이니, 그러니 오늘은 억지로 일어서지 않아도 괜찮다.

이 습한 마음이 그냥 지나가게 두자. 지나가는 길로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갈 것이니, 그저 붙잡지도 말고, 막아서지도 말고,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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